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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 햄릿, 여성 셜록, 여성 헤르메스… 올 여름도 공연계는 젠더프리 캐스팅

국내에서 미투 운동 이후 확산… 창작진과 관객에게 새로운 상상력의 기회 제공

입력 : 2024-06-18 06:00/수정 : 2024-06-26 14:44
지난 2020년 국립극단 70주년 기념으로 제작된 연극 ‘햄릿’은 주인공 햄릿을 왕자가 아닌 공주로 설정했다. 당시 코로나19 팬데믹으로 온라인 공연만 이뤄졌었다. 2020년에 이어 올해 공연도 배우 이봉련이 타이틀롤을 맡았다. (c)국립극단

지난 2021년 국내 초연한 뮤지컬 ‘하데스타운’은 그리스 신화 속 오르페우스와 에우리디케의 이야기를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작품이다. 제우스의 아들로 이승과 저승을 오가는 헤르메스는 이 작품에서 시작과 끝을 알리며 오르페우스를 지하세계로 인도하는 역할이다. 7월 12일 재연의 막을 올리는 ‘하데스타운’은 관록 있는 여배우 최정원을 최재림, 강홍석과 함께 헤르메스 역에 낙점하는 젠더프리 캐스팅을 도입했다. 앞서 브로드웨이에서 공연된 ‘하데스타운’도 지난 2022년과 올해 헤르메스 역으로 여배우를 캐스팅해 좋은 평가를 받은 바 있다.

젠더프리(Gender-free) 캐스팅은 배역의 성별에 구애받지 않고 배우를 정하는 것을 가리킨다. 여배우가 남성 캐릭터를 연기하는 경우가 많다. 공연계에서 남성 중심 서사가 대부분이라는 문제의식이 공유되면서 뿌리 깊은 성 불평등 문제를 바로잡으려는 시도에서 비롯됐기 때문이다. 국내에서는 미투 운동 이후 젠더 감수성이 높아지면서 작품을 여성의 시각으로 풀거나 여배우에게 주체적인 배역을 주려는 데서 시작됐다.

뮤지컬 ‘하데스타운’은 올해 재연을 하면서 여배우 최정원을 최재림, 강홍석과 함께 헤르메스 역에 낙점하는 젠더프리 캐스팅을 도입했다. 에스앤코

올해만 해도 지난 3월 한국 초연 무대에 오른 김태형 연출의 연극 ‘바스커빌 : 셜록 홈즈 미스터리’가 두 주인공인 홈즈와 왓슨에 젠더프리 캐스팅을 시도했다. 여배우 정다희와 양소민이 장재웅 송광일과 함께 각각 홈즈와 왓슨을 연기했다. 이에 따라 다양한 성별 조합의 홈즈-왓슨 콤비가 발생하면서 비교해보려는 반복 관람을 일으키기도 했다. 호평이 이어진 이 작품은 6월 22일~10월 20일 연장공연에 들어가면서 여배우 오소연이 왓슨 역으로 새로 합류한다.

이외에도 오는 30일 막을 내리는 오세혁 작·연출의 뮤지컬 ‘데미안’이 젠더프리 캐스팅을 적극적으로 시도했다. 헤르만 헤세의 동명소설을 원작으로 한 이 작품은 주인공 싱클레어가 친구 데미안을 만나면서 일어나는 내적 성장을 2인극으로 풀어냈다. 2020년 초연 당시엔 혼성, 2023년 재연은 동성, 세 번째 시즌인 올해는 동성과 혼성이 섞인 캐스팅을 시도했다.

연극 ‘바스커빌 : 셜록 홈즈 미스터리’가 두 주인공인 홈즈와 왓슨에 젠더프리 캐스팅을 시도했다. 모멘트메이커

젠더프리 캐스팅에서 더 나아가 아예 배역의 성별을 바꾸는 젠더밴딩(gender-bending) 캐스팅도 확산되고 있다. 국내에선 젠더프리 캐스팅이란 용어로 통칭하지만, 젠더프리가 원작을 그대로 둔 채 배우의 성별만 바꾼다면 젠더벤딩은 극 중 캐릭터의 성(性)을 아예 바꿔 각색한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오는 7월 5∼29일 서울 명동예술극장 무대에 오르는 국립극단의 ‘햄릿’이 대표적이다.

‘햄릿’은 지난 2020년 국립극단 70주년 기념으로 제작됐지만, 코로나19 팬데믹으로 온라인 공연만 이뤄졌었다. 연극계에서 주목받는 극작가 정진새와 연출가 부새롬이 셰익스피어 원작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이 작품은 기독교적 세계관을 대거 삭제하고 등장인물의 선악 구분을 모호하게 만들었다. 무엇보다 주인공 햄릿을 왕자가 아닌 공주로 설정한 것이 눈에 띈다. 이에 따라 원작에서 햄릿이 사랑하는 오필리어는 이번에 남성으로 바뀌었고, 남성 일색이었던 햄릿의 친구들도 여성으로 변경됐다. 2020년에 이어 이번에도 배우 이봉련이 햄릿 공주 역을 맡았다. 초연 당시 온라인 공연만 이뤄졌지만 이봉련은 이 작품의 열연으로 이듬해 백상예술대상 연극 부문 연기상을 받았다.

엄현희 연극평론가는 “젠더프리·젠더벤딩 캐스팅은 작품에 새로운 층위의 해석을 부여함으로써 창작진과 관객에게 상상력을 펼치도록 만든다”면서 “다만 배우들이 바뀐 역할을 연기할 때 스테레오타입화된 남성성 또는 여성성을 구현하는 것은 본래의 젠더프리 취지와 맞지 않는 만큼 더욱 섬세한 접근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장지영 선임기자 jyjang@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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