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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후교회로 가는 길⑤] “화석연료 중독을 벗는 길, 이 시대의 제자도”

기후변화와 제자도 / 장준식 세화교회 목사

미국 환경운동가들이 지난해 3월 워싱턴DC 국회의사당 앞에서 해변용 의자에 앉아 기후변화에 대한 대응을 촉구하고 있다. AFP연합뉴스

“차이를 만들어 낼 유일한 변화는 인간의 가슴을 변화시키는 것이다.”(피터 셍지, Peter Senge) 일생에서 가장 먼 여행은 머리에서 가슴까지의 여행이라고 합니다. 신영복 선생은 여기에서 더 나아가 ‘가슴에서 발까지의 여행’을 덧붙입니다. 결국, 우리가 일생 해야 할 여행 중 가장 먼 여행은 머리에서 가슴을 거쳐 발까지 가는 것이라는 뜻입니다. 그리스도인들에게는 그리 낯선 개념이 아닙니다. 우리가 가진 ‘제자도’라는 말이 그 뜻을 담고 있으니까요. 제자도란 제자가 가야 할 길을 가리키는데, 예수를 따르는 사람(a follower of Christ)의 길이란 예수께서 걸어가신 그 길을 똑같이 걸어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에베소서에서 이런 말을 합니다.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 이는 우리가 이제부터 어린아이가 되지 아니하여 사람의 속임수와 간사한 유혹에 빠져 온갖 교훈의 풍조에 밀려 요동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엡 4:13-14)

『기후교회』는 제자도를 묻습니다. “기후위기의 세계에서 예수를 따른다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가.”(기후교회, 161쪽) 제자도는 매우 역동적인 개념입니다. 저명한 사회학자 지그문트 바우만의 ‘리퀴드’ 개념을 빌려 제자도를 표현한다면 제자도란 고정된 것이 아니라 ‘유동적(liquid)’입니다. 제자도는 한 시대에 고정된 것이 아니라 역사를 따라 바뀝니다. 예수 그리스도에게 신실하고자 했던 신앙의 선조들은 모두 자기 시대의 문제를 못 본 척하지 않고 끌어안고 씨름했습니다. 멀리는 로마제국의 멸망의 지켜보면서 기독교 신학을 탐구했던 아우구스티누스가 그랬고 가까이는 나치의 포학에 맞서 제자도를 고민했던 독일 고백교회의 신학자들, 특히 바르트나 본회퍼가 그러했습니다. 한국 기독교 역사에서는 김교신이나 다석 유영모 같은 분들이 일제시대와 영적 위기에 맞서 참된 제자도가 무엇인지를 고민했습니다. 그들은 모두 제자도란 단순히 예수 믿고 구원받아 천국 가는 문제가 아니라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로서 당면한 시대의 문제와 씨름하는 것임을 알았던 것이죠.

제자도를 진지하게 생각하는 신앙인은 경건한 신앙의 선배들이 물었던 질문을 동일하게 할 줄 알아야 합니다. 본회퍼가 그 질문을 한 문장으로 아주 잘 정리해 주었습니다. “오늘 우리에게 그리스도는 누구신가. Wer ist Christus für uns heute.” 우리는 ‘오늘’을 보고 있습니까. 오늘 우리가 사는 세계에서는 무슨 일이 발생하고 있습니까? 『기후교회』는 오늘 우리가 사는 세계에서 발생하고 있는 일들에 대해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고 그러한 일들에 맞선 제자도가 무엇인지를 묻고 있습니다. 그중 가장 주목하는 것은 지난 2세기 동안 발생한 화석연료의 추출과 그것을 이용한 물질적 성장입니다. 화석연료의 사용과 물질적 성장의 추구가 가져온 결과는 풍요만이 아니고 기후변화를 동반했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삶에 풍요를 가져오는 바로 그것이 인간의 생명을 멸망시킨다면 이것만큼 모순되는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라스무센의 『지구를 공경하는 신앙』에 나온 진술을 이용해 짐 안탈 목사는 단호하게 말합니다. “신앙인들로서 우리도 인간의 경제가 ‘생태학적 비용에 무관심하게 병리학적으로’ 굴러가는 것을 곁에서 가만히 서서 지켜볼 수는 없다.”(기후교회, 164쪽) 지난 200년 동안 화석연료를 사용해 인류가 행한 일은 경제성장에 대한 맹목적인 숭배입니다. 우리는 인간의 경제가 “생태학적 비용에 무관심하게 병리학적으로 굴러간다”는 말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것이 무슨 뜻인지 미국에서 발생하고 있는 총기사고를 보면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습니다. 미국에서는 매일 같이 총기사고가 나서 무고한 생명이 수도 없이 죽어 나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정부에서는 총기규제를 하지 않습니다. 모두 돈 때문입니다. 총기 사고로 인해 1년에 수만 명씩 죽어 나가도 상관하지 않습니다. 그야말로 생태학적 비용(생명이 죽어 나가는 일)에 무관하게 병리학적으로 총기구매와 사용이 허가되고 있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인류는 경제성장을 위해서 모든 생태학적 비용을 마치 없는 것처럼 생각합니다. 이것은 병리적 현상입니다. 병입니다. 병(disease).

지난 200년간 인류 역사에서 발생한 근대화(modernity)는 경제성장을 위해 모든 것을 희생시켰습니다. 경제가 블랙홀이 된 시대였습니다. 그래서 정치도 사회도 문화도 그리고 종교도 모두 경제를 위해서 봉사하고 희생했습니다. 그렇게 해서 우리가 세운 사회는 ‘물질적 소비’위에 세워진 사회가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다음과 같은 용어들이 가치 있고 도덕적이고 미적인 사회가 됐습니다. ‘성장 소비 발전 중독 과잉 편리 무시 자기중심’ 인류는 오로지 이것들을 위해서 사는 것처럼 보입니다. 성장하지 않으면 소비하지 않으면 발전하지 않으면 중독되지 않으면 과잉되지 않으면 편리하지 않으면 무시하지 않으면 자기중심적이지 않으면 실패한 인생처럼 생각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생태학적 비용에 무관심하게 병리학적으로’ 성공을 위해 살아갑니다.

이러한 삶이 문제인 이유는 ‘삶’을 ‘생명’을 ‘생태’를 지속적이지 못하게 합니다. 삶은 지치고 생명은 끊어지고 생태는 망가지고 맙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우리는 ‘제자도’에 대해서 생각을 해보아야 합니다. 제자도란 예수 그리스도께서 걸어가신 생명의 길을 가는 것인데 과연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늘 우리가 사는 세계에서 살아가신다면 어떠한 삶을 살아가셨을까요. 생명을 구원하시는 그리스도께서 성장과 소비 발전과 중독 과잉과 편리 무시와 자기중심에 사로잡혀 삶을 지치게 만들고 생명을 끊어지게 하며 생태를 망가뜨리는 길을 걸어가셨을까요. 그럴 리 만무합니다(It’s absolutely not!).

잠시 멈추어 생각해 보면 우리가 인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지난 200년 동안의 제자도라는 것이 경제성장과 맞물려버린 것 같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성장’이라는 용어에 매몰돼 ‘제자도란 성장을 일구는 것’인 양, 우리도 모르게 ‘생태학적 비용에 무관심하게 병리학적으로’ 제자도를 실행해 온 듯합니다. 『기후교회』는 기후위기의 세계에서 예수를 따른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진지하게 물으며 제자도를 재설정하기를 촉구합니다. 성장 대신에 탄력성을 소비 대신에 협력을 발전 대신에 지혜를 중독 대신에 균형을 과잉 대신에 적당함을 편리 대신에 비전을 무시 대신에 책임성을 그리고 자기중심적 두려움 대신에 자기를 내어주는 사랑을 오늘 우리에게 필요한 제자도로 제시합니다.

이렇게 새롭게 제시된 제자도를 한 마디로 줄여서 다시 설명하면 오늘 우리에게 제자도란 체제 변화 운동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지난 200년간 인류는 화석연료 사용과 경제성장 추구의 체제를 구축했습니다. 우리는 화석연료에 심하게 중독되어 있습니다. 세계 최고 부호 상위 10위 가운데 3개가 에너지 사업과 관련 있습니다. 미국의 코흐 인더스트리스와 사우디아라비아의 사우드 가문, 인도의 릴라이언스 인더스트리가 그것입니다. 쓰고 나면 재생할 수 없는 화석연료 대신에 재생 가능한 에너지로 경제를 구성하는 체제를 우리는 새롭게 구축할 수 있을까요. 『대지의 선물』에서 웬델 베리가 이런 말을 합니다. “당신이 이웃을 사랑하면서 그 이웃의 삶이 의존하고 있는 위대한 유산을 경멸하는 것은 모순이다.”(기후교회, 191쪽)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것은 그리스도인에게 빼놓을 수 없는 제자도입니다. 이웃을 사랑한다면서 이웃이 의존하고 있는 ‘위대한 유산’을 경멸하는 것은 이웃을 욕보이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이러한 것은 신앙이나 제자도가 아니라 기만이고 사기입니다.

기후위기를 맞아 우리의 제자도는 기존의 제자도와 무엇이 어떻게 달라져야 할까요. 기후위기를 맞아 우리는 여전히 개인구원 영혼구원만 외칠 수 있을까요. 그렇지 않다면 예배 설교 기도 선교 친교 봉사의 측면에서 기존의 제자도와 어우러진 새로운 제자도는 무엇이어야 할까요. 그리스도를 따르는 무리로서 진지하게 고민해 보지 않을 수 없는 문제입니다. 우리의 머리는 우리의 가슴은 우리의 발은 무엇을 향하고 있습니까.

장준식 세화교회 목사

손동준 기자 sdj@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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