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일본의 ‘뮤지컬 한류’, 거품 빠진 뒤 지속성장중

2월에만 ‘사랑의 불시착’ ‘전설의 리틀 농구단’ 등 4편 공연… 흥행 성공적

입력 : 2024-02-22 05:00/수정 : 2024-02-22 16:49
일본 도쿄 요미우리홀에서 공연중인 한국 창작 뮤지컬 ‘사랑의 불시착’ 주역 배우들이 커튼콜에서 관객에게 감사 인사를 전하고 있다. 관객들이 일제히 휴대전화를 들고 배우들을 찍고 있다. (c)에이투지엔터테인먼트

일본 도쿄 요미우리홀(1100석)에서는 지난 8일 한국 창작 뮤지컬 ‘사랑의 불시착’의 막이 올라갔다. 뮤지컬 ‘사랑의 불시착’은 남한 재벌 상속녀 윤세리와 북한 장교 리정혁의 사랑을 그린 2020년 동명 드라마를 원작으로 한다. 한국 공연의 경우 2022년 초연과 지난해 재연을 통해 완성도를 높였지만, 흥행 면에서는 두 번 다 좋은 성적을 거두지 못했다. 하지만 이번 일본 공연은 달랐다. 첫 회 공연을 시작으로 28일까지 26회 회차 대부분이 매진을 기록하고 있다. 오는 7월 도쿄에서 2주간 재공연까지 예정돼 있다.

일본 무대에 오른 ‘사랑의 불시착’은 일본 후지TV와 한국 제작사 에이투지엔터테인먼트와 아스틴카멜(구 T2N)이 공동으로 선보였다. 뮤지컬 배우들을 캐스팅했던 한국 프로덕션과 달리 일본 프로덕션은 남자 주인공인 리정혁과 구승준 역에는 아이돌 그룹 아스트로의 윤산하와 진진, 그룹 더보이즈의 상연을 캐스팅했다.

일본 도쿄 요미우리홀에서 공연중인 한국 창작 뮤지컬 ‘사랑의 불시착’의 한 장면. (c)에이투지엔터테인먼트

뮤지컬 ‘사랑의 불시착’의 일본 흥행은 원작에 대한 일본 관객의 뜨거운 사랑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드라마 ‘사랑의 불시착’은 코로나19 팬데믹 이후 일본의 4차 한류를 주도한 것으로 유명하다. 시미즈 마리코 후지TV 부장은 “머지않은 시기에 일본 배우들이 출연하는 라이선스 공연도 선보일 것”이라고 밝혔다.

라이선스 획득해 일본 현지화 한 프로덕션 주류

2월 일본에서는 사랑의 불시착’을 포함해 한국 뮤지컬 4편이 나란히 공연되고 있다. ‘전설의 리틀 농구단’(15~25일 도쿄·3월 2~3일 오사카), ‘스모크’(1월 23일~3월 31일 도쿄), ‘윌리엄과 윌리엄의 윌리엄들’(10~12일 다마·15~18일 효고·28일~3월 4일 도쿄)로, 일본에서 좋은 반응을 얻고 있다. ‘전설의 리틀 농구단’은 개막 전에 티켓의 90%가 팔리는 기염을 토했으며, ‘스모크’는 작은 극장이긴 하지만 두 달 넘게 공연된다. ‘사랑의 불시착’과 달리 이들 작품은 모두 일본 배우들이 출연했다. ‘스모크’의 경우 원작을 쓰고 연출한 추정화 연출가가 이번에 일본 프로덕션도 직접 연출을 맡았다. 추정화 연출가는 “두 달 동안 일본 배우들과 함께 작업했는데, 그들의 열정과 성실함에 감동받았다”고 밝혔다.

일본 도쿄 소게츠홀에서 공연중인 뮤지컬 ‘전설의 리틀 농구단’의 한 장면. (c)FAB

최근 일본에서 한국 뮤지컬은 라이선스를 획득해 일본 스태프와 배우에 의해 현지화한 것이 대부분이다. 지난해만 하더라도 ‘마리 퀴리’ ‘땡큐베리스트로베리’ ‘비더슈탄트’ ‘엑스칼리버’ ‘다윈영의 악의 기원’ ‘베토벤’ 등이 라이선스 공연된 바 있다. ‘베토벤’의 경우 한국 EMK뮤지컬컴퍼니의 연출, 안무, 무대, 영상, 소품, 조명 등까지 동일하게 공연되는 세미레플레카(Semi-Replica) 프로덕션 형식으로 선보여졌다.

일본 도호가 지난해 선보인 뮤지컬 ‘베토벤’은 한국 EMK뮤지컬컴퍼니의 연출, 안무, 무대, 영상, 소품, 조명 등까지 동일하게 공연되는 세미레플레카(Semi-Replica) 프로덕션으로 선보여졌다. (c)Toho

소위 ‘뮤지컬 한류’는 2010년 동방신기 출신의 김준수가 뮤지컬 ‘모차르트’에 출연하면서 시작됐다. SM엔터테인먼트와 전속 계약 분쟁을 겪느라 방송이나 콘서트에서 볼 수 없었던 김준수가 무대에 나오자 일본 팬들이 앞다퉈 ‘모차르트’를 보러 서울에 온 것이다. 이후 한국 뮤지컬 제작사들은 아시아에서 두터운 팬덤을 가진 K팝 스타를 앞다퉈 캐스팅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한국 뮤지컬을 새로운 수익원으로 본 일본 공연계와 일본 시장을 개척하고 싶었던 한국 공연계가 손잡게 됐다.

초기 뮤지컬 한류는 K팝 스타 마케팅 한계 노출

2011년 일본 대형 제작사 쇼치쿠가 한국 그룹에이트의 ‘궁’과 CJ E&M의 ‘미녀는 괴로워’를 선보인 것은 일본에서 뮤지컬 한류의 출발점이 됐다. 두 작품 모두 초신성의 성모, 카라의 규리 등 일본에서 인기 있는 아이돌을 캐스팅했다. 이후 일본에 진출한 한국 뮤지컬이 2012년 7편에 이어 2013엔 18편까지 늘어났다. 이들 뮤지컬은 대부분 한국 배우들이 공연한 프로덕션이었다. 그리고 ‘삼총사’ ‘잭더리퍼’ 등 좋은 성과를 낸 사례도 있지만 대체로 부진한 성적을 거뒀다.

김준수가 출연한 뮤지컬 ‘모차르트’의 2010년 초연 장면. 이 공연을 계기로 ‘뮤지컬 한류’가 시작됐다고 할 수 있다. (c)EMK뮤지컬컴퍼니

지나치게 높은 티켓 가격 등 도를 넘은 스타 마케팅 상술이 문제가 되면서 일본에서 뮤지컬 한류의 거품도 점차 빠지기 시작했다. 특히 2013년 한국 뮤지컬을 9편 연속으로 선보였던 아뮤즈 엔터테인먼트의 프로젝트가 대규모 적자로 끝난 이후 전체 공연 편수도 줄어들었다. 나아가 뮤지컬 한류가 K팝의 인기에 기댄 파생상품에 불과하다는 비관론까지 나왔다.

하지만 거품이 빠지면서 오히려 뮤지컬 한류가 안정적으로 자리잡게 됐다. 라이선스를 통한 현지화로 K팝 팬에게 의존하던 것을 넘어 한국 뮤지컬의 작품성으로 인정받게 된 것이다. 기량 있는 창작진과 팬층이 두터운 배우들을 기용하는 한편 일본 공연계 시스템에 맞게 일찌감치 홍보와 마케팅을 한 덕분이다.

일본 도호예능과 큐브가 제작한 뮤지컬 ‘셜록 홈즈-앤더슨가의 비밀’의 한 장면. (c)도호예능-큐브

2014년 일본 대형 제작사 도호의 자회사인 도호예능과 큐브가 선보인 ‘셜록 홈즈-앤더슨가의 비밀’과 ‘블랙 메리 포핀스’는 현지화로 바뀐 흐름을 잘 보여준다. ‘셜록 홈즈-앤더슨가의 비밀’은 도쿄 등 7개 도시에서 공연하며 흥행을 이끌어냈다. 그래서 이듬해 바로 속편인 ‘셜록 홈즈-블러디 메리’의 3개 도시 투어로 이어졌다. ‘블랙 메리 포핀스’ 역시 같은 해 도쿄 초연에서 호평을 얻어 2016년엔 4개 도시 투어가 이뤄졌다.

한국 제작사들 대신해 라이선스 다룰 에이전시 필요

도호가 호리프로와 함께 2016년 선보인 ‘프랑켄슈타인’은 한국 대극장 창작 뮤지컬로는 처음 일본에 라이선스가 판매된 사례다. 이후 도호는 EMK뮤지컬컴퍼니의 ‘마리 앙투아네트’ ‘웃는 남자’ ‘베토벤’, 서울예술단의 ‘다윈영의 악의 기원’ 등을 잇따라 공연하는 등 한국 뮤지컬 수입에 적극적이다. 올해도 ‘나빌레라’ ‘팬레터’의 라이선스 공연이 예정돼 있다. EMK뮤지컬컴퍼니의 경우 도호 외에 우메다예술극장에 ‘마타하리’, 다카라즈카 가극단에 ‘엑스칼리버’의 라이선스를 파는 등 대극장 뮤지컬의 일본 진출에 절대적인 위상을 차지하고 있다.

일본 도호의 뮤지컬 ‘마리 앙투아네트’의 한 장면. 이 작품은 원래 도호가 2006년 제작한 것을 한국 EMK뮤지컬컴퍼니가 2014년 재창작했다. 그리고 도호가 다시 2018년 EMK뮤지컬컴퍼니로부터 공연권을 얻어 무대에 올리고 있다. (c)Toho

소극장 창작 뮤지컬의 경우 일본 제작사 가운데 LDH 재팬과 아틀라스가 적극적이다. LDH 재팬은 일본의 대표적 댄스보컬 그룹 ‘EXILE’을 모체로 한 기업으로 2021년부터 공연 사업에 진출했는데, ‘인터뷰’ ‘차미’ ‘천사에 관하여: 타락천사편’ ‘시데레우스’ ‘비더슈탄트’ 등 한국 뮤지컬의 라이선스 공연을 선보이고 있다. 또 아틀라스 뮤지컬은 2016년 ‘김종욱 찾기’를 시작으로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 ‘더 데빌’ ‘호프’ ‘스모크’ ‘블루레인’ 등 10편에 가까운 한국 뮤지컬을 라이선스로 올렸다.

‘땡큐베리스트로베리’와 ‘전설의 리틀 농구단’의 라이선스를 일본에 판매한 정인석 아이엠컬처 대표는 “뮤지컬 한류와 관련해 현재 라이선스 판매가 가장 활발하고 유의미한 나라가 일본이다. 공연 시장이 크고 티켓 가격이 높으며 매출 관련 데이터를 확실히 알 수 있기 때문”이라면서 “다만 공연권의 계약 또는 재계약에 어려움을 느끼는 한국 프로듀서들이 많다. 각자 개인적으로 대응하다 보니 계약 조건도 들쑥날쑥하다. 브로드웨이나 웨스트엔드처럼 제작사를 대신해 일관성 있게 공연권 계약을 할 수 있는 에이전시의 필요성이 높아지고 있다. 아직은 시장이 적어서 민간이 움직이기 어려운 만큼 공적 지원이 필요하다고 본다”고 말했다.

도쿄=장지영 선임기자 jyjang@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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