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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수록 더 빛나는 라스트 갤럭시…‘룰러’ 박재혁의 2023년

라이엇 게임즈 제공

‘룰러’ 박재혁의 2023년은 새롭고 뜻깊었다. 그는 새 소속팀에서 3번의 우승을 이뤘다. 아시안게임 금메달을 따냈다. LoL 월드 챔피언십(월즈)을 4강에서 마무리해 결과적으로 그랜드슬램을 달성하지는 못했지만 그는 “올해는 전혀 후회가 남지 않는다”면서 “프로 데뷔 후 가장 행복했던 한 해”라며 속시원하다는 듯 웃었다. 그의 눈가엔 아쉬움이 보이지 않았고 후련함이 가득했다.

박재혁과의 인터뷰는 28일 서울의 한 카페에서 1시간 30분 동안 진행됐다. 올해 여정을 최근 월즈에서부터 톺아보다가 막판에는 역체원(역대 최고 원거리 딜러)이나 에이징 커브같이 민감한 주제에 대해서까지 얘기를 나눴다.

월드 챔피언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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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즈를 4강에서 마무리했다.
“매년 ‘이 팀원들과는 월즈를 우승할 수 있겠다’고 생각해왔는데 4강 근처만 가면 고꾸라졌다. 그래서 올해도 비슷한 조바심과 걱정이 들었다. 그런데 또 막상 2023년 내내 탄탄대로를 걷지 않았나. 이번엔 정말 우승할 수 있겠다 싶었는데…또다시 준결승전 문턱을 넘지 못해서 아쉽다.”

-최초의 그랜드슬램을 놓쳐서 더 아쉽겠다.
“나는 그랜드슬램 달성이 불가능에 가깝다고 생각한다. 월즈는 변수가 정말 많은 대회다. 우승과 그랜드슬램을 목표로 두기보다는, 당장 앞에 있는 경기에서 이기는 데 집중하고 나와 팀의 경기력을 개선하는 방법을 찾는 데에만 몰두했다.”

-스위스 스테이지를 전승으로 마쳤을 때만 해도 기세가 좋았는데.
“JDG를 향한 팬들의 기대치, 팀원들의 기대치를 생각한다면 당연히 전승 통과해야 했다.”

-8강전에서 KT를 만났다.
“솔직하게 얘기하면 KT전은 질 거라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그 정도로 자신감이 넘쳤다. 첫 세트를 패배했음에도 아이러니하게 ‘오늘은 이겼다’는 확신이 들었다. 바텀 라인전이 워낙 유리했기 때문이다. 패배 직후 피드백을 해보니 감독님께서도 비슷한 생각을 하고 계셨다. 라인전 상성이 불리한 걸 감수하더라도 후반 밸류 픽을 고르면 된다고 생각했다. KT 바텀이 라인전에서 필요 이상으로 위축돼 있단 느낌을 받았다.”

-준결승전에서 T1을 만나 패배했다.
“준결승전을 앞둔 스크림에서도, 실제 경기에서도 바텀 라인전에 힘을 주는 챔피언들이 많이 나왔다. 우리는 아마 T1이 그런 챔피언들을 스크림에서 써서 유행시켰겠거니 판단했다. 준결승에 올라가면 보통 반대쪽 브래킷에 속한 팀들과 스크림을 하지 않나. BLG와 WBG가 스크림에 이어서 준결승전에서도 그런 챔피언들을 쓰니까…T1도 무조건 쓰겠다 싶었다. 그래서 바루스·애쉬 조합을 충분히 연습하지 않았음에도 실전에서 쓰게 됐다. 칼리스타·레나타 글라스크를 놓고도 고민을 필요 이상으로 많이 했다. 한 마디로 섀도복싱을 과하게 했던 셈이다.”

-스크림의 함정에 빠졌던 건가.
“우리의 판단 착오를 너무 늦게 알아차렸다. 굳이 바텀 라인전이 강한 챔피언을 할 필요가 없다는 사실을 늦게 깨달은 게 패착이었다. 8강전과 비슷한 구도로, 자야 대 카이사 매치업을 유도하거나 후반 밸류 픽을 뽑았다면 다른 결과가 나올 수도 있지 않았을까. T1전도 바텀 라인전은 생각보다 괜찮게 풀렸던 것 같아서 노선 선택에 대한 아쉬움은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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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세트에서 제리를 고른 것도 이 때문이었나.
“4세트 픽에도 비하인드 스토리가 있다(웃음). 사실 트리스타나를 고르려 했는데 팀원들이 제리를 원했다. 스크림에서 트리스타나 연습을 많이 했다. 나는 챔피언의 포텐셜(성장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팀원들은 제리가 더 낫다고 했다. 나도 팀원들의 의견을 따랐다. 팀원들을 탓하려는 건 아니다. 다만 내가 게임에서 제리로 뭔가를 보여주지 못한 점이 아쉽다.”

-월즈는 놓쳤지만, 나머지 대회를 모두 우승했다.
“그래서 올해가 유독 길게 느껴졌다. 선수로서 나설 수 있는 모든 대회에 나섰으니까. 그만큼 열심히 했다. 후회도 남지 않고 후련한 감정만 든다. 작년에도 후회를 남기지 말고 최선을 다하자는 생각으로 월즈에 임했다. 그래도 지니까 결국 후회할 점이 생기더라. 그런데 올해는 정말로 후회가 남지 않는다.”

-특히 KT전 4세트에서 분위기를 뒤바꾼 카이사 플레이는 오래 회자될 듯하다.
“사실 다른 원거리 딜러 선수들이 그 상황에서 같은 진입 각을 볼 수도 있을 거라는 생각은 한다. 하지만 비슷한 각을 볼 수 있을 뿐, 나만큼 잘했을 거라고 생각하진 않는다. 최선의 무빙, 최선의 스킬샷을 최선의 순서로 실행했다. 나만이 할 수 있는 플레이였다고 자신한다.”

-반면 준결승전 3세트에서 ‘페이커’ 이상혁에게 토스를 당한 장면은 뼈 아파서 기억에 남는다.
“우리가 상대 미드 2차 포탑을 민 상황이었다. 이제 바텀 2차 포탑을 밀어야 했다. 갑자기 아트록스를 노리자는 콜이 나와서 화면과 시선을 아트록스 쪽으로 돌렸다. 그 순간 아지르가 밀고 들어왔다. 점멸로 토스를 피해야겠다고 생각했지만 공중에 뜨고 말았다.”

-그 한타 장면을 다시 본 적이 있나.
“그 장면을 다시 본 적은 없다. 시즌이 끝나는 원인이 된 경기는 다시 안 보게 되더라. 다만 시뮬레이션은 많이 해봤다. 아지르가 날아올 때 내 궁극기로 막는 건 화면이 아트록스 쪽으로 향해 있어서 불가능했다. 점멸을 다른 쪽으로 쓰기도 애매했다. 아마 어떻게 써도 렐이나 아트록스에게 물렸을 거 같다. 근본적으로 운영 실수가 패인이었다. 욕심내지 않고 바텀 2차 포탑을 밀었더라면 어땠을까 싶다.”

-친정팀 젠지가 8강에서 충격적인 탈락을 당했다. 무슨 생각이 들던가.
“솔직히 젠지가 BLG에 질 거라고는 예상하지 못해서 충격을 받았다. 젠지가 올해 워낙 잘했으니까. 친정팀의 충격 패에 대한 아쉬움과 허탈함이 컸다. 속으로는 ‘나 없으니까 잘 안 되지?’하고 짓궂은 생각도 잠깐 했다(웃음).”

항저우 아시안게임
항저우 아시안게임 e스포츠 공동취재단

-항저우에서 아시안게임 금메달도 목에 걸었다.
“2018년 자카르타에서 생겼던 트라우마와 정면으로 맞섰고, 이를 깨부순 느낌이다. 내 한계를 뛰어넘었다는 성취감이 들었다. ‘엘크’ 자오 자하오 선수가 눈물을 흘리는 모습을 보면서 2018년의 내가 떠오르기도 했고…여러모로 오랫동안 기억에 남을 대회다.
천운이 따랐다고도 생각한다. 2018년에 은메달을 땄던 내가 5년 뒤 금메달을 목에 걸다니. 작년에는 대표팀 승선을 포기하고 서머 시즌에만 집중하려고 했다. 그런데 코로나19로 대회가 1년 연기됐다. 올해도 JDG로 이적해 대표팀 선발 경쟁에서 불리하다고 생각했는데 성적이 잘 나온 덕에 김정균 감독님의 부름을 받았다. 정말 실력만큼이나 운도 좋았던 것 같다.”

-대표팀 출전 경기수가 가장 많은 선수가 됐다. 프로팀과 대표팀은 무엇이 다른가.
“프로팀에서는 선수들끼리 최소 1년을 함께하지만 국가대표는 다르다. 1달가량 연습하고 대회를 치르면 해산이다. 솔직히 프로팀보다 대표팀에서 피드백을 주고받는 게 더 어렵다. 아마 나는 실력에 대한 자신감이 있어서 그랬는지, 내가 알고 있는 모든 것을 솔직하게 팀원들에게 말했다. 곧 월즈에서 만나면 적이 될 사이지만 내 챔피언 선호도와 노하우 등을 다 털어놨다.
사실 2018년에는 대표팀 선수들끼리 모든 걸 터놓고 얘기했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한 명이 자발적으로 나서서 모든 정보를 오픈해야 다른 선수들도 완전히 마음을 열 거라고 생각했다. 내가 선호하는 밴픽 구도, 나의 노하우와 라인전 구도 데이터 등을 처음부터 끝까지 가감 없이 다 얘기했다.”

-항저우 연습실에서 매일 가장 늦게 퇴근했다고 들었다.
“하루도 빠짐없이 내가 제일 늦게 퇴근했다. 연습을 더 한다고 해서 더 간절한 건 아니겠지만 나는 정말 간절해서 연습실에 오래 머물렀다. 팀원들의 경쟁심과 향상심을 자극하고 싶은 마음도 있었다.”

LPL
라이엇 게임즈 제공

-집 같다던 젠지를 떠나기로 마음먹었을 때 무슨 생각이 들었나.
“눈앞이 어두컴컴했다. 데뷔 후 처음으로 해외에 나간다는 불안감과 내가 잘할 수 있을지에 대한 걱정, 두려움이 컸다. 지금도 여전히 그런 걱정들을 하며 지낸다. 완전히 다른 언어와 문화에 대한 적응 문제가 완전히 해소된 것도 아니다. 그저 실력에 대한 자신감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그런데 곧바로 LPL에서 우승했다.
“무엇보다 신기했다. 선수 생활을 오래 했지만 작년 서머 시즌 전까지 국내 리그 우승과는 연이 닿지 않았으니까. ‘나도 리그 우승을 할 수 있다’하는 기쁜 감정이 우선 들었고, 다음으로는 처음 나서는 MSI에 대한 부담감과 불안감이 엄습했다.
2017년 이후로 국제대회에서 만족할 만한 성과를 내지 못했다. 4강, 8강 진출도 결과만 놓고 보면 못한 건 아니라 생각한다. 하지만 팬이라면 실망할 수밖에 없는 성적이다. 팬들은 우승을 기대하며 우리를 응원하는 분들 아닌가. 언제부턴가 나도 그 성적들을 실패로 여기게 되더라. MSI는 리그를 대표해 나서는 팀이 2개 밖에 없어서 더 부담감이 컸다. MSI까지 우승하자 그제야 ‘나 아직 안 죽었구나’하고 자신감과 확신을 얻었다.”

-서머 시즌까지 우승할 거라 확신했나.
“사실 시즌 초반에는 우승할 거란 확신이 들지 않았다. 시즌 첫 경기였던 WBG전을 졌을 때도 충격이 크지 않았다. 오히려 이후 연승 도중 승패와 별개로 팀이 게임을 잘한다는 느낌을 못 받아서 불안했다. 하지만 시즌이 중반부에 접어들자 티어 정리 결과에 대한 확신, 팀원들의 기량 회복 등이 느껴져서 그때부터 우승을 예감했다.
결승전 1세트를 비교적 쉽게 이겨서 마음이 편했다. 그런데 그다음에 두 세트를 내리 졌다. 집중하지 못했고, 우리의 장점을 보여주지도 못했다. 밴픽도 만족스럽지 않았다. 모든 전략을 과감하게 수정해서 4세트를 따냈다. 마지막 세트까지 접전을 벌인 끝에 우승할 수 있었다.”

-LNG가 결승전 5세트에서 원거리 딜러로 직스를 고른 게 의외였다.
“직스는 고를 만한 챔피언이 맞다. 하지만 5세트에서는 꺼내면 안 된다고 생각한다. 5세트일수록, 중요한 경기일수록 후반 밸류 픽을 뽑아야 한다. 아무리 유리해도 플레이오프나 결승전같이 중요한 경기 5세트가 되면 게임이 길어지기 마련이다. 사람이 하는 게임이어서 아무리 유리해도 안전하게 게임하려는 마음이 생긴다. 불리한 팀한테 기회가 올 수밖에 없다. 평소보다 파밍 시간 1분, 코어 아이템 1개가 더 생기게 된다. 그래서 (스노우볼을 굴려야 하는) 직스는 5세트에 꺼내면 안 된다.
작년 담원 기아와의 스프링 시즌 플레이오프 경기에서도 마찬가지였다. LNG와의 결승전보다 불리한 게임이었는데 결국 내가 성장할 기반이 마련되더라. 나는 작년부터 ‘5세트는 밸류 픽이 정답’이라는 게임론(論)을 세웠다.”

-JDG가 올해 내내 BLG와 LNG의 앞길을 막아섰다.
“BLG는 처음 만났을 때만 해도 플레이에서 자신감이 넘쳤다. 그런데 우리를 만날 때마다 지니까 점점 자신감이 줄어드는 게 느껴졌다. LNG는 정말 강하고, 잘하는 팀이었다. 다만 뒷심이 부족하다는 인상을 받았다.”

-‘엘크’의 천적이란 평가도 받았다.
“‘엘크’가 유난히 나에게 약하다는 생각은 해본 적 없다. BLG란 팀이 강해서 높은 곳까지 자주 올라왔고, 우리와 자주 만났고, JDG가 그들보다 더 강해서 매번 이겼을 뿐이라고 생각한다. 아마 ‘엘크’가 아닌 다른 원거리 딜러가 그 자리에 있었어도 똑같은 결과가 나왔을 것이다.”

-중국 원거리 딜러들과 1년간 맞붙어본 감상은.
“확실히 두 리그에 차이가 있더라. 바텀만 놓고 보면 LCK는 반반 구도를 선호한다. LPL 선수들은 더 공격적으로 움직인다. 리그 전반을 놓고 보자면, LCK는 기본기에 충실하다. LPL은 기본기가 부족한 대신 싸움 구도를 잘 본다. 그리고 이게 양 리그의 국제대회 희비를 가르는 것 같다.
LCK 팀들의 탄탄한 기본기는 넓은 챔피언 폭과 높은 숙련도로 이어진다. 월즈는 기간이 길어서 한 패치로 진행하는데도 메타가 여러 번 바뀐다. 올해만 해도 스위스에서 자야 대 카이사 매치업이 주로 나오다가 녹아웃부터는 세나·탐 켄치 등이 추가돼 메타가 급변했다. 팀들은 다른 팀의 경기를 지켜보면서 ‘저거 좋아 보이니까 우리도 해보자’하면서 다른 팀의 메타 해석을 적극적으로 수용하는데, LCK가 이런 걸 따라 하는 데 정말 강하다.
반면 MSI는 대회 기간이 짧다. 올해 징크스와 아펠리오스, 제이스·마오카이, 애니 등 처음 나온 챔피언들로 끝까지 메타가 유지됐다. 처음 상위 티어로 인정받은 챔피언들의 숙련도가 높은 팀이 끝까지 웃을 수 있는 대회다.”

유관행동, 에이징 커브, 역체원

-‘유관행동’이라는 게 있다고 생각하나.
“솔직히 잘 모르겠다. 틀린 판단이라는 걸 알고 있지만, 스스로를 믿고 자신감을 갖고서 버튼을 누르면 좋은 결과가 나올 때는 있다. ‘나도 틀린 걸 알지만 이걸 하지 않으면 진다’는 생각이 들어서 행동으로 옮기곤 하는데, 그게 정확히 유관행동인지는 모르겠다. 시도가 통하지 않으면 조금이나마 있던 승리 확률마저도 사라지기도 한다. 그게 유관행동이라면 유관행동 아닐까.”

-2016년 월즈 결승전 5세트에서 치명적 데스로 이어진 ‘요우무 진’ 플레이가 떠오른다.
“그 플레이 때문에 조롱을 많이 당했다. 하지만 나는 지금도 그건 해야만 하는 플레이였다고 생각한다. 어차피 게임이 길어지면 지는 게 뻔했다. 당시 상대 빅토르의 후반 캐리력이 워낙 강했다. 시도해볼 만한 플레이였고, 결과적으로 실패해서 지는 시간이 앞당겨졌을 뿐이다. 승률을 1%라도 올리기 위한 플레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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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면 2017년 월즈 결승전 3세트에서 시도한 앞점멸→궁극기 사용은 우승으로 이어졌다.
“맞다. 그것도 2016년 결승전의 요우무 사용과 플레이의 결은 비슷했다.”

-향후 목표로 하는 바가 있는지.
“특별히 성적을 목표로 하고 있지는 않다. 나는 앞으로도 계속 노력할 것이고, 성적은 운명이 결정해줄 것이라고 믿고 있다. 다만 나를 응원하신 분들이 1년이든, 2년이든, 평생이든 그 기간에 관계없이 ‘룰러를 응원하는 동안은 즐겁고 행복했다’고 훗날 떠올리셨으면 한다. 그러기 위해서 보는 맛이 있는 플레이, 팬할 맛이 나는 플레이를 하려고 한다.”

-언제까지 현역으로 활동할지 생각해본 적이 있나.
“우선은 30살까지 선수 생활을 목표로 하고 있다. 당장 은퇴하기엔 내가 너무 잘한다.”

-에이징 커브라는 게 존재한다고 생각하나.
“허상이라고 생각한다. 전성기가 일제히 꺾이는 나이가 있다는 가설 아닌가. 나는 모든 e스포츠 선수들의 기량 향상과 감퇴 시기를 그래프화하면 그 편차가 정말 클 거라고 생각한다. 에이징 커브는 한 마디로 ‘이제 못해도 되는 시기야’라고 옹호해주는 일종의 위안거리라고 생각한다. 어린 나이에 전성기 기량을 잃은 선수들이 많은데 거론되지 않을 뿐이다. 반면에 내 기량은 매년 우상향 중이고, 나같은 선수들도 많다.”

-민감한 질문을 계속해서 던져도 되나. 박 선수는 본인이 역체원이라고 생각하나.
“하…(웃음) 솔직히 역체원이 나인지는 아직 모르겠다. 하지만 향후 몇 년간은 내가 제일 잘할 거라는 믿음이 있다. 앞으로도 그런 기량을 유지한다면 현역에서 물러날 때쯤엔 내가 많은 이들에게 역체원으로 인정받지 않을까?”

-앞서 다른 인터뷰에서 가장 강했던 적수로 ‘뱅’ 배준식을 꼽았던데. 그 생각은 여전한가.
”지금 생각해봐도 그때 ‘뱅’ 선수가 가장 잘했다. SKT라는 팀을 어떻게 이겨야 할지 모르겠는 시기가 있었다. 그 고민 가운데에는 늘 ‘페이커’와 ‘뱅’ 선수가 있었다. 역시 그때 ‘뱅’ 선수가 가장 잘했다고 생각한다.”

-그다음으로 가장 힘들었던 맞수가 있다면.
“그다음은 ‘우지’ 젠 쯔하오 선수다.”

-이견이 있겠지만, 사실 기자는 박 선수가 이미지만큼 ‘우지’ 상대로 약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어느 정도는 동의한다. 하지만 그와 별개로 ‘우지’는 정말 잘했다. 아직도 그 생각을 한다. 2017~2018년의 ‘우지’는 내가 아닌 다른 선수였어도 똑같이 박살 났을 거다. 그때의 ‘우지’는 정말이지 아무도 막을 수 없는 선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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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혁과 중요 경기에서 여러 번 맞붙었다. 박 선수만의 T1 상대법이 있나.
“이번 월즈에서도 느꼈지만 T1 상대로는 후반 밸류가 좋은 픽을 해야 한다. T1은 라인전을 잘하고, 라인전에 비중을 두는 팀이다. 보통 라인전이 좋은 챔피언들은 후반 밸류가 떨어진다. 나는 게임 후반에는 내가 제일 잘한다는 자신감이 있다. 후반 밸류로 승부를 보는 게 맞다고 생각한다. (이 얘기가 기사에 나가도 되나?) 상관없다. 후반에 나만큼 잘할 수 없다면 못 베끼는 나만의 노하우다.”

-끝으로 인터뷰를 통해 하고 싶은 얘기가 있었는지.
“…‘룰러는 자존심이 세다. 챔피언 티어 정리를 못한다’같은 프레임에 대해서 해명을 하고 싶다. 사실 그 얘기 때문에 스트레스를 많이 받는다. 챔피언 티어 연구나 밴픽 토론도 열심히 한다. 내 노력이 인정받지 못하는 느낌이 들어서 속상한 마음이 있다.
팀을 위해 밴픽 단계에서 희생하고자 했던 것들이 ‘룰러는 뭘 잡아도 이긴다고 한다’는 얘기로 와전됐다. 이를테면 이번 월즈에서는 자야 대 카이사 구도에서 자야가 유리한 걸 모두가 알고 있었다. 나는 ‘카이사로 버텨줄 테니 다른 포지션에서 좋은 픽을 먼저 골라라’라고 팀에 제안했다. 내 경험과 기량으로 불리한 구도를 버티겠다는 의도가 그런 프레임으로 와전돼 속상한 마음이 몹시 크다.
LPL로 활동 무대를 옮겼는데도 국내 팬분들께서 꾸준히 관심을 가져주시는 게 감사하고 또 신기할 따름이다. 앞으로도 열심히 달려보겠다. 여러분이 제게 보내주시는 응원처럼 저도 여러분을 늘 응원한다. 행복한 연말을 보내시고 하시고자 하는 일들도 전부 잘 풀리길 바란다.”

윤민섭 기자 flame@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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