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정부가 한국을 ‘백색 국가’(수출심사 우대국)에서 배제하는 내용의 수출무역관리령 개정안을 공포한지 하루 만에 대(對)한 수출규제 강화 품목 중 하나인 포토레지스트의 한국 수출을 허가한 것을 두고 일본 내부에서도 해석이 엇갈리고 있다.
세코 히로시게 일본 경제산업상은 8일 기자회견을 통해 대한 수출 관리를 강화한 반도체 핵심소재 3종(고순도 불화수소, 플루오린 폴리이미드, 포토레지스트) 중 일부의 수출을 허가했다고 밝혔다. 자국 기업들의 한국 기업에 대한 개별 수출 신청건을 심사한 결과 군사적 용도로 사용될 우려가 없어 수출 계약 1건을 허용했다는 취지다. 일본 정부가 지난달 4일 반도체 핵심 소재의 대한 수출규제를 강화한지 한 달여 만에 나온 첫 허가다.
일본 정부가 기자회견까지 열어 한국 수출 허용 사례를 공개한 배경에는 ‘수출규제 강화 조치는 결코 한국 대법원의 강제징용 배상 판결로 인한 경제 보복이 아니다’는 것을 부각하고자 하는 의도가 깔려 있는 것으로 보인다. 세코 경제산업상은 “통상 수출허가를 낼 때 개별 결과를 대외적으로 공표하지 않지만, 한국 정부가 수출관리 강화 조치를 부당하게 비판하고 있어 예외적으로 공표한다”고 강조했다.
통상 90일 가량 걸리는 심사 기간보다 빠르게 한국 수출을 허가한 것도 의미심장하다. 글로벌 공급 체인에 악영향을 끼칠 수 있다는 국제적 비판을 의식한 조치로 보인다. 통상의 무기화가 아닌 정상적인 수출관리라는 것을 한국 외 제3국에 거듭 알려 국제 여론전에서 명분 상 우위를 점하겠다는 의도다. 일본 정부 대변인인 스가 요시히데 관방장관도 정례브리핑에서 “정당한 거래에는 자의적 운용을 하지 않고 허가를 내주는 모습을 보여준 것”이라고 강조했다.
극우 성향의 산케이신문은 “일본 정부는 군사 전용 등의 우려가 없으면 수출을 허용하겠다는 방침을 고수해왔다”며 “이번에 일본 기업의 한국 수출을 허가함으로써 (수출규제 강화 조치가) 한국 측 반발과 달리 ‘금수 조치’에 해당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줬다”고 분석했다.
일본 정부가 까다로워진 대한국 수출절차의 직접적 영향을 받아 수출길이 험해진 자국 기업들의 아우성을 외면하기 어려웠을 것이라는 분석도 나온다. 이들 수출기업의 주 고객이 삼성전자, SK하이닉스 등 한국의 반도체 회사들인 탓이다.
니혼게이자이신문은 일본 정부의 반도체 소재 수출 관리 강화로 국제 소재 분야에서의 점유율 축소를 우려하고 있는 관련 업종 관계자들의 우려를 비중있게 보도했다. 포토레지스트 수출업체인 도쿄오카공업 관계자는 “반도체 생산에 한·일 여러 회사가 연계돼 있어 실적에 영향을 미칠 가능성이 있다”고 말했다. 신문은 “반도체 핵심소재 3종 관련 일본 기업들이 개별 수출 심사 때마다 제출해야 할 서류가 늘어나는 등 한국 수출 절차가 복잡해지면서 부담이 늘어났다”고 전했다.
하지만 일본 정부의 한국 수출 승인을 수출규제 완화 등의 긍정적 시그널로 해석하기는 어렵다. 세코 경제산업상은 이날 “잘못된 사례가 나오면 개별 허가 신청 품목 확대를 포함해 추가 대책을 강구하겠다”고 말했다. 반도체 핵심 소재 3개 품목 외에도 군사 전용이 가능한 제품 및 기술에 대해서는 언제든 추가 규제 강화 카드를 뽑을 수 있다는 것을 강조한 것이다. 일본 정부가 현재 규제 확대를 검토하는 대상은 화학무기와 생물학 무기의 원료 및 첨단재료, 센서, 레이더, 통신기기 등 약 240개 품목에 달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형민 기자 gilels@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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