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 매체가 문재인 대통령에 대한 강한 비난을 담은 논평을 냈다.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과 두 차례나 정상회담을 가진 문 대통령에 대한 비난은 이례적이다.
북한 노동당 기관지 노동신문은 20일 ‘주제넘는 허욕과 편견에 사로잡히면 일을 그르치기 마련이다’라는 제목의 논평에서 “화해·평화 분위기를 푼수 없이 휘저으며 관계개선을 저해하는 온당치 못한 발언들이 때 없이 튀어나와 만사람이 미간을 찌푸리게 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이 논평은 문 대통령이 싱가포르 국빈 방문 중이던 지난 13일 ‘싱가포르 렉처’ 일문일답에서 “국제사회 앞에서 (북미) 두 정상이 직접 한 약속을 지키지 않는다면 국제사회로부터 엄중한 심판을 받게 될 것”이라고 한 발언을 문제 삼았다. 이 발언에 대해 “주제넘는 발언도 늘어놓았다”고 평했다.
논평은 “현실에 대한 맹목과 주관으로 일관된 편견이고, 결과를 낳은 엄연한 과정도 무시한 아전인수격의 생억지이며, 제 처지도 모르는 희떠운 훈시라고 평하지 않을 수 없다”며 “우리로 하여금 남조선당국의 ‘한반도 운전자론’에 대해 재조명하고 그 실체를 해부해볼 필요를 느끼게 하고 있다”고 밝혔다. 이어 논평은 이어 “남조선당국이 입버릇처럼 외우는 ‘한반도 운전자론'이나 ’주도적 역할론'이 얼마나 황당무계한 궤설인가 하는 것은 판문점선언 이후 그들이 취한 행위만 놓고서도 잘 알 수 있다”며 “남조선 당국은 말로는 판문점선언 이행을 떠들고 있지만, 미국 상전의 눈치만 살피며 북남관계의 근본적 개선을 위한 아무런 실천적 조치를 취하지 않고 있으며, 그것으로 하여금 북남 사이에 해결해야 할 중대 문제들이 무기한 표류되고 있다”고 덧붙였다. 문 대통령이 전면에 내세운 ‘한반도 운전자론’을 직접 거론하며 강도 높은 비난을 한 것이다.
또 논평은 “경악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은 갑자기 재판관이나 된 듯이 조미공동성명의 약속을 지키지 않을 경우 그 누구가 ‘국제사회로부터 엄중한 심판을 받게 될 것’이라고 감히 입을 놀려댄 것”이라며 “허황한 운전자론에 몰입돼 쓸데없이 훈시질을 해대는 것은 조선반도 평화 과정에 풍파를 일으키고, 불순세력들에게 어부지리를 주는 불행한 결과만 초래하게 될 것이다. 남조선 당국은 외세추종이 아니라, 진정으로 자주통일의 길, 우리민족끼리의 길에 나서야 한다”고 주장했다. 문 대통령을 ‘누구’라고 지칭했지만 ‘감히 입을 놀려댄 것’ ‘훈시질’ 등의 표현으로 맹비난했다.
박원곤 한동대 교수는 이날 “6·12 북·미 정상회담 이후 전반적으로 북한이 (비핵화 협상 등에) 숨고르기를 하면서 점차 완고한 입장이 강화되고 있다”며 “북한이 확실히 주도권을 잡고 가겠다는 입장을 보여준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어 “과거부터 이어온 남한 길들이기의 일종일수도 있다. 우리 정부는 당황스러울 수밖에 없겠지만 조급하기보다 정리하고 숨고르기를 할 필요가 있다”고 덧붙였다.
임을출 경남대 극동문제연구소 교수는 “두 번이나 정상회담을 한 문 대통령일지라도 최고존엄이자 지도자인 김 위원장에게 훈수를 두는 것은 북한 체제의 특성상 용납하기 어려웠을 것”이라며 “판문점 선언 이후에도 남북경협에 실질적인 진전이 없는 것에 대한 불만을 드러낸 것으로도 볼 수 있다”고 분석했다. 이어 “북한은 우리 측이 너무 미국의 눈치를 본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섭섭함과 좀 더 자주적 입장을 견지했음을 전한 것 같다”고 덧붙였다.
정부는 북한 관영매체의 보도에 대응하지 않겠다는 방침이다. 이유진 통일부 부대변인은 정례브리핑에서 “북한 매체 보도에 대해 일일이 언급하거나 평가하지는 않는다”며 “남북 간 정상이 합의한 판문점 선언이 차질 없이 이행될 수 있도록 하겠다”고 밝혔다.
이상헌 기자 kmpaper@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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