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새는 좌우의 날개로 난다”
저널리스트이자 진보적 사상가였던 고(故) 리영희(1929∼2010) 전 한양대 명예교수의 말이었다. 그는 같은 제목의 저서에서 “8·15 광복 이후 근 반세기 동안 이 나라는 오른쪽은 신성하고 왼쪽은 악하다는 위대한 착각 속에 살아왔다. 이제는 생각이 조금은 진보할 때가 되지 않았을까? 그러지 않고서야 어찌 새보다 낫다고 할 수 있겠는가?”라며 광복 이후 한국 사회를 지배해온 냉전반공주의를 비판했다.
진보 진영에서 주로 사용했던 리 교수의 말이 최근 들어 보수 정치인들의 입에서 나오고 있다.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 이후 회복되지 않고 있는 ‘보수 궤멸’ 상태를 대변한다는 분석이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보수-진보의 균형을 강조하는 리 교수의 말을 갖다 쓰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주사파’ ‘좌파’ 등의 용어를 써가며 역설적으로 냉전반공주의 시절의 색깔론을 펼친다는 비판이 나온다.

◇보수의 입에서 나온 진보의 말 “새는 좌우 날개로 난다”
김태호 자유한국당 경남지사 후보는 8일 서울 중구 한국프레스센터에서 열린 김경수 더불어민주당 후보와의 관훈토론회 기조연설에서 “대한민국은 한 쪽으로 너무 기울어져있다”며 “새도 두 날개로 날듯이 국가도 마찬가지”라고 말했다. 리 교수의 말을 인용한 것이다.
김 후보는 이 자리에서 “보수가 이제 궤멸의 부분에 가 있는 게 사실”이라며 “경남까지 무너지면 완전히 독점이다. 그 부분이 국가적으로 위기라고 생각한다”고도 말했다.
한국당에서 리 교수의 말이 인용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지난 1월 2일 박성중 홍보본부장은 최고위원회의에서 “새는 좌우 날개가 균형점이 맞아야 오래 날 수 있다”며 “좌파와 우파가 균형이 맞아야 한다. 좌파로 너무 기울어진 나라는 미래가 없다”고 말했다.
본래 ‘좌우 날개’라는 수사(修辭)는 냉전 반공주의가 득세하던 시절 ‘색깔론’과 ‘진보 죽이기’를 비판하기 위해 사용돼왔다. 이승만-박정희-전두환 전 대통령 등으로 이어지는 보수 정권들은 분단체제 하에서 냉전 반공주의를 앞세우며 정국을 주도해왔다. 조봉암 진보당 사건, 인혁당 사건, 김대중 내란음모 사건 등이 대표적이었다.
이 같은 시대를 거쳐오며 리 교수는 “진보의 날개만으로는 안정이 없고 보수의 날개만으로는 앞으로 갈 수 없다”며 “좌와 우, 진보와 보수의 균형 잡힌 인식으로만 안정과 발전이 가능하다”고 강조했다.

◇지지부진한 보수의 현실
보수 진영의 좌우 균형 논리는 이 같은 리 교수의 인식을 정반대로 뒤집은 것이다. 이는 지지부진한 보수의 현실을 반영하는 것이기도 하다. 문재인정부에 대한 국정지지율을 70%대 후반으로 치솟는 반면, 한국당 등 보수야당들의 지지율은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는 상황이다.
여론조사기관 리얼미터는 CBS 의뢰로 지난달 30일과 이달 2~4일 전국 성인 2002명을 상대로 설문조사(95% 신뢰수준에 표본오차 ±2.2% 포인트, 자세한 조사개요와 결과는 리얼미터 홈페이지 또는 중앙선거여론조사심의위원회 홈페이지를 참고) 결과를 7일 공개했다. 이에 따르면 문 대통령의 국정 지지율이 77.4%, 더불어민주당은 8주 연속 50%대 지지율을 지켰다.
반면 한국당의 지지율은 지난주 같은 조사보다 3.2% 포인트 하락한 17.9%로 이 기관의 조사에서 지난 6주간 유지해온 20%대가 무너졌다. 중도보수를 표방하는 바른미래당은 0.1% 포인트 하락한 6.0%에 그쳤다.
더군다나 평창 동계올림픽과 남북 및 북·미 정상회담으로 이어지는 거대 이슈들 틈에서 한국당이 제기하는 이슈들은 거의 묻히고 있는 상황이다. 김성태 원내대표가 ‘드루킹 특검’을 요구하며 단식농성에 돌입했지만 여론은 싸늘한 상황이다.

◇색깔 입힌 좌우 균형론
문제는 보수에서 ‘좌우 균형’을 얘기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색깔론을 이어간다는 점이다. 김태호 후보는 토론회에서 “위장평화쇼” “창원에 빨갱이가 많다”고 비난한 홍준표 대표의 발언에 대해 “표현이 거칠었다. 신중하셔야 한다”고 수습하면서도 “일부 국민 뜻도 반영돼있다”고 말했다.
홍 대표는 9일에도 페이스북에 올린 글에서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의 2차 방중에 대해 “북한은 또 한 번의 비핵화 거짓 평화쇼를 펼치고 있다. 문재인 정권이 추진하는 한반도 비핵화 쇼는 위험한 도박이라고 수차례 지적한 바 있다”고 말했다.
이어 “DJ(김대중 정권), 노무현(정권)에 이어 문재인 정권도 북핵 공범으로 끝날지 모르지만 5000만 국민은 북핵 인질이 돼 처참한 핵의 노예가 되는 상황이 올 수도 있다”고 주장하며 “북에서 매일같이 비난의 대상이 되고 남에서 조롱과 비난의 대상이 돼도 나는 개의치 않는다”고 말했다.
하지만 6·13 지방선거를 앞둔 상황에서 역풍 조짐이 보이면서 당 내부에서도 반발의 목소리가 나온다. 일부 후보들은 당 지도부와 선긋기에 나서기도 했다. 남경필 경기지사는 한국당의 6·13 지방선거 슬로건인 ‘나라를 통째로 넘기시겠습니까’에 대해 “동의하지 않는다”며 “국민의 보편적 인식과 거리가 멀다”고 비판했다.
이 때문에 보수 정당들이 맹목적 반공을 넘어서는 가치와 정책을 내놓아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보수 진영이 색깔론이나 정부여당의 단기적인 실책에 기대는 게 아니라 자체적으로 장기적이고 일관된 정책 및 지향점을 갖고 있어야 등 돌린 지지층을 다시 끌어올 수 있다는 것이다.
한국당에서도 이런 고민을 바탕으로 일부 전략을 수정하려는 움직임이 나타난다. 안보 이슈를 앞세워 지지층을 결집하려는 전략이 통하지 않자 경제를 내세우며 선거전략을 전환하려는 것이다. 한국당은 전날 6·13 지방선거 두 번째 슬로건으로 ‘경제를 통째로 포기하시겠습니까? 경제는 자유한국당입니다’를 선정했다고 밝혔다.

권중혁 기자 green@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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