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션라이프] 취재팀은 지난달 31일 옌타이(煙臺)로부터 남동쪽으로 90㎞ 떨어져있는 웨이하이(威海)에 도착했다. 웨이하이는 명대(明代) 초 왜구를 방어하기 위해 위소(衛所)를 설치했기 때문에 웨이하이웨이(威海衛)라고도 불렸다. 청대(淸代)에 위소를 폐지한 후에도 이 명칭은 계속 쓰였다. 특히 이곳은 초기 한국인 선교사인 박태로 목사가 1913년 5월 중국을 방문, 여러 곳을 시찰하다가 잠시 머물던 곳이다.
평남 안주교회 김찬성 목사와 함께 산동장로회와 선교지역을 정하기 위해 옌타이를 방문한 박 목사는 김 목사가 귀국한 뒤 웨이하이로 잠시 이동했다. 취재팀은 약 100년 전 박 목사의 흔적을 찾으려 했지만 매우 어려운 숙제를 떠안고 있는 듯했다. 우리는 단지 그가 웨이하이 예수교 강서당(講書堂)에서 머물며 앞으로의 중국 사역을 고민했다는 기록을 의존해 강서당의 옛터를 찾으려 애썼다. 그러다가 결국 웨이하이항 바로 앞 대규모 아파트 단지가 있는 환추이취(?翠區) 지넨루(記念路) 산자오화웬(三角花園) 자리가 강서당이 있던 곳이라는 단서를 찾을 수 있었다. 이어 100여년 전 주요 도시였던 원덩(文登)과 ‘해상왕’ 장보고가 세운 처산(赤山)법화원(法華院), 그의 기념관이 서있는 스다오(石島)에 가보았다.
한국의 중국선교엔 평양의 길선주 목사, 재령의 헌트 선교사가 있었다
기자는 웨이하이를 취재하면서 한국교회가 왜 유독 산둥(山東)성을 선교지로 꼽았는지 매우 궁금했다. 통설에 따르면 중국은 한국과 문화적으로 유사성이 강했고 지리적으로 가깝다. 또 당시 많은 산둥인이 경제적 어려움을 피해 한국에 거주했던 터라 우리에게 산둥하면 곧 중국이 연상됐다. 다음으로 국제 관계상 교섭이 가장 무난한 곳이었다. 당시 한국과 중국은 거의 국제법을 초월해 양국민이 자유롭게 왕래하고 있었다. 아울러 산둥성은 한국 선교에 가장 큰 영향력을 발휘하던 미국 북장로회 선교부가 가장 활발하게 활동하던 지역이다.
취재팀은 뜻밖에도 길선주 목사가 제주도에 선교사(이기풍 목사)를 보내 전도를 시작하자고 보고하기 전인 1906년 제주도가 아닌 중국선교의 뜻을 밝혔다는 걸 알아냈다. 길 목사의 아들인 길진경 목사가 지은 ‘영계(靈溪) 길선주’에 따르면 길 목사는 “우리는 불원에 우리나라 전역에 복음을 전파하게 될 것”이라며 “그렇게 되면 흑암 속에 묻혀있는 수억의 중국인들에게 미국 교인들이 우리에게 한 것처럼 선교사를 보내어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의 도를 전하는 의무를 수행하게 될 것”이라고 역설했다. 이때의 주장이 제주도에서 먼저 경험을 축적한 뒤 중국선교를 하려 했던 것인지, 선교 의지가 제주도로 변경된 것인지는 알 수는 없다.
1912년 통계를 보면 우리나라의 교인 총수는 14만4260명, 세례교인은 5만300명이었다. 이는 제주도 선교가 시작된 1907년에 비해 교인 수 8만7317명, 세례교인 3만4927명이 각각 늘어난 것이다. 1912년 통계에 따르면 목사 66명, 장로 225명, 교회 총수 2054곳에 달했다. 그중 가장 먼저 중국 선교사로 선택된 박 목사는 1912년 평양신학교 5회 졸업생이었다.
윌리엄 블레이어 헌트(韓韋廉·William Blair Hunt) 선교사는 한국교회의 중국선교에 또 다른 주역이다. 그는 1915년 ‘더 코리아 미션 필드’란 잡지에 ‘한국장로교단의 미션워크’라는 제목의 글을 통해 “중국에 선교사들을 파송하려는 아이디어가 수년 동안 한국교회에 어필됐다”고 말했다. 다른 선교사들도 한국의 위치가 중국선교를 하는 데 유리하고 한국이 아시아 복음화에 공헌하는 날이 올 것이라고 예상했다. 헌트 선교사의 중국선교 의지를 읽을 수 있는 대목이 적잖다. 그가 세운 황해도 재령 명신학교의 1909년 추수감사절 행사에서 강대상 앞에 커다란 중국지도를 걸어놓고 학생들이 기념사진을 찍었다. 또한 헌트 선교사는 1912년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 설립과 함께 중국선교를 결의하자 직접 산둥성으로 건너가 현지 미국인 선교사들과 협의했다.
박태로 목사, 절절한 선교편지 보내다
“이리저리 생각하니 죄 없이 정배 온 모양이나 이것저것 덮어 놓고 신령계로 생각한즉 감사하고 기쁜 마음 태평양도 부족이라 시시마다 홀로 앉아 동천 향해 기도하며 삼위 주께 통정하나, 이곳 인생 형편 보면 가긍하고 가련하오, 많고 많은 숫한 인종 박의박식 가련하되, 동네마다 좋은 집은 우상 봉사하는 묘요, 부녀들의 정형 보면 가련한 중 극하도다.”
1913년 5월 강서당에서 머물던 박태로 목사의 첫 선교편지다. 이 편지는 제임스 스카드 게일(奇一·James Scarth Gale) 선교사가 발행한 7월 ‘예수교회보’에 소상히 실렸다. 박 목사는 자신의 처지와 형편을 생각하기보다 중국 영혼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의 편지를 잠시 더 읽어보자. “여보 우리 부형 자매님네들 본방에 역사하는 형님들이여 일일시시 곤고할 때 이 형편을 생각하고 우리 조선 받은 복은 특별한 줄 깊이 알고 특별하신 성력으로 이곳 위해 기도하며 진심 감사드립시다….”
박 목사는 자신의 뜻보다 주님의 뜻이 무엇인가에 마음을 썼다. 당면한 모든 일에 대한 답을 하나님 말씀 안에서 찾아 위로와 힘을 얻었다. 40여 세에 선교사로 부름 받아 ‘중국 관화(중국 표준어)’를 배우려니 기억력이 따르지 못해 염려하기도 했다. 그때마다 “예수께서 저희를 보시며 가라사대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되 하나님으로는 그렇지 아니하니 하나님으로서는 다 하실 수 있느니라(막 10:27)”는 말씀으로 자신감을 되찾곤 했다. 또 고향과 부모, 형제 생각이 나고 거처가 곤란해질 때, 음식이 달라 어려울 때 하나님 말씀으로 위로받고 소장했던 사진들을 보고 안식을 되찾았다. 생전 처음 중국을 방문했기에 중국어를 구사할 줄도, 가까운 벗도 없었다. 마음이 답답한 그에게 기도만이 유일한 돌파구였다.

원덩엔 폐허가 된 영국 교회 터가 남아있다
박 목사는 웨이하이에서 머물면서 근처에 위치한 원덩(文登)이라는 마을에 전도하러 갔다. 하지만 현지 중국인이 아닌 영국 선교사들에게 의해 축출됐다. 원덩은 당시 영국 형제교회 선교사들이 중국 정부의 허락을 받아 활동하던 곳이었다. 이 때문에 다른 교파, 특히 동양인의 출현에 영국 선교사들은 불편한 심기를 드러낸 것이다. 결국 박 목사는 예상치도 못한 장벽을 만나 할 수 없이 웨이하이로 돌아와야 했다. 취재팀은 수소문 끝에 원덩의 스마제(石馬街)에 남아있는 유일한 영국 교회의 터를 찾아냈다. 주변 건물들에는 곧 철거가 된다는 표시인 ‘차이(?)’ 글씨가 즐비했다. 한 귀퉁이 건물에서 폐지 등 고물들이 널 부러져 있던 곳에서 허름한 건물을 발견했다. 외부에선 과거 이곳이 교회였다는 흔적을 쉽게 찾아볼 수 없었다. 순간 깨진 유리창안에서 선명한 십자가 표시가 눈에 들어왔다. 98년 전 박 목사를 내쫓았던 그 영국 선교사들이 있던 곳이 아닐 수 있겠지만 일순간 묘한 생각이 들었다.
박 목사는 옌타이, 웨이하이 등지를 방문한 뒤 다시 고국으로 돌아왔다. 이어 박 목사가 소속돼 있던 조선예수교장로회 황해노회가 1913년 6월 27일부터 제4회 노회를 개최했다. 노회는 김익두 목사가 찰스 에드원 샤프(史佑業·Charles Edwin Sharp) 선교사와 동사목사로 시무하던 신천읍교회에서 열렸다. 앞서 총회 전도국에 의해 중화민국 선교사로 청빙됐기 때문에 박 목사는 이 회의에서 재령읍교회 위임 목사직을 공식적으로 내려놓았다. 또 맡고 있던 황해노회 서기직 역시 신학교 졸업 동기이자 함께 목사 안수를 받은 최병은 목사에게 이양됐다. 당시 전도국 위원은 단지 조선인 목사들로만 구성된 것이 아니었다. 조선 주재 선교사들도 포함돼있었다.
길 목사를 중심으로 초기 조선인 목회자들은 중국선교 비전과 뜻을 세워 조선 주재 선교사들에게 협조하는 것이 의미가 있을 것이라고 여겼다. 박 목사는 “아직도 어리고 자신들의 지도를 받아야 할 조선장로교회가 동족을 대상으로 한 사역이 아닌 중국인에게 선교사를 파송하겠다고 협조하는 게 의미가 남다르다”고 평가했다. “그저 받았으니 그저 주라는 말씀에 순종하는 믿음의 실천이다. 우리는 이를 이행하기 위해 최대의 힘을 다할 뿐이다.” 즉, 주님의 절대적 분부이자 명령에 대한 순종, 이것이 바로 중국선교를 시작한 동력이었다.
한편 2개월여 뒤인 9월 7일, 경성(京城·서울)에서 제2회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가 소안동 예배당에서 개최됐을 때 박 목사는 산동성 지역을 시찰했던 내용을 총회대의원(총대)들에게 설명했다. 총대들은 그의 보고를 받고 매우 기뻐했다. 이어 그해 평양신학교 6회 졸업생인 김영훈(金永勳), 사병순(史秉淳) 목사를 선교사로 선택했다.
웨이하이 원덩=글 함태경 기자(zhuanjia@kmib.co.kr) 김교철 목사, 사진 서영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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