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술 회고록] “목사남편, 가난한 교회만 부임… 안 해본 일이 없지”
전북 정읍 소성면 김용례 할머니
4남1녀의 막내로 태어나 6·25 당시 빨갱이들 손에 어머니 임숙례 권사와 둘째 오빠, 둘째 올케, 조카 넷을 잃은 전북 정읍시 두암교회 김용례(80) 사모. 함남 흥남에서 비료 공장을 하는 큰오빠 덕에 풍요로운 어린 시절을 보냈다. 큰오빠 김용은 전도사가 교회를 창립하고 건물을 지으면서 빚도 졌다. 혼수 마련이 어렵자 열아홉 살에 큰오빠가 운영하는 보육원의 직원인 서명선씨와 결혼을 시켰다. 서씨는 목사 안수를 받고 없는 교회에만 부임해 자녀들이 보내주는 용돈을 모아 교회를 건축했다. 김 사모는 평생을 목회에만 전념하는 남편을 대신해 입에 풀칠이라도 하기 위해 안 해본 일이 없다. 지난 1월 서 목사는 파킨슨병을 앓다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 이제 자손밖에 남지 않은 김 사모는 6월이 오면 사모곡을 부르며 두암교회 언덕에 오른다.
부유했던 어린 시절
태자리가 여그에요. 바로 이 너머에 마을이 있거든. 소성면 애당리 두암마을이에요. 아버님은 다섯 살 때 일찍 돌아가시고. 당장에 아버지가 없으니 어떻게 살거여. 사람 죽으면 사자밥 해놓잖아. 그 놈을 어머니가 갖다가 씻쳐서 끓여서 주더라고. 그거 먹고 살았어, 큰오빠랑. 그러다가 큰오빠가 양동리라는 곳에 깔담살이<풀을 베서 소 먹이는 사람>로 머슴살이 갔어요. 밥도 방에서 못 먹고 부뚜막에서 먹고 그러다가 기술을 배워야겠다고 해서 입암면으로 갔어요. 입암서 벌어 한 푼이고 보내주면 어느 부자 부럽지 않지.
큰오빠 용은 목사가 대주 노릇을 했어요. 함남 흥남에서 비료공장 사장이었어. 두암 사람들을 많이 데려가 일을 시켰어. 나도 데려갔어. 어머니가 보고 싶어 못 살것어. 어머니 보고 싶어서 학교고 아무리 별것을 줘도 밤이면 잠을 못 잤대. 그래서 거기서 초등학교 2학년까지 댕기다가 헐 수 없응게 보냈어. 보냈는데 여기는 소성까지 걸어서 다녀야 혀. 근데 가는 사람이 없어. 동네에서. 그래 가지고 가도 못했어. 세상에 학교 졸업도 못하고 그렇게 살았어. 오빠들은 다 다녔지. 오빠는 비료공장 사장을 하면서 두암 사람들을 많이 데려다가 내려 보낼 때는 월급은 월급대로 주고 송아지 한 마리 값을 다 줬어. 그리고 함남서 돈을 벌어 보내주니까 두암 웬간한 텃논은 다 샀었어요. 을매나 미워하것어요.
양놈과 손잡고 교회 세운다고 구박
큰오빠가 입암 이발소를 다녔어. 근데 이발소 주인아줌마가 교회를 다녀. 집사님이여. 그래서 거기서 전도를 받아가지고 예수를 믿게 되었어요. 열일곱 살 때부터 교회를 나갔어요. 큰오빠가 전도 받은 후니께. 우리 가족은 교회를 재 너머 입암까지 다녔어. 다니다가 오빠가 조요셉 선교사님을 모시고 와서 집에다 교회를 세워서 예배를 드렸지요. 교회 이름이 두암교회. 교회를 농촌에서 기와집으로 지었어요. 교회를 지으니까 얼마나 수군거리는지 몰라요. 미국 양놈들하고 손잡고 교회를 세운다고. 아니꼽게 여겼지요. 교회를 지어가지고 신앙생활하다 오빠는 신학교를 가시고 주일날이면 정읍제일교회 장로님이 오셔서 예배를 드렸어요.
하나님 아버지도 아버지다
시어머니는 열일곱 살 먹고 시아버지는 열네 살 먹고 시집 장개를 갔어. 시어머니는 바느질로 아드님을 키웠어요. 시아버지가 스무 살에 여수 가서 새 장개를 가버렸네. 그래서 남편은 아버지를 못 불러봤대요. 친구들이 아버지 하면 따라 댕기면서 아버지 하다 니가 아버지가 어딨냐고 어떻게 맞었는가. 그 뒤로 아버지란 소리 안하다가 교회에 나와서 하나님 아버지라 한 게 그 이상 좋을 수가 없드래요. 우리 목사님은 교회 나옹게 하나님 아버지 할 때마다 눈물이 줄줄 쏟아지더래요. 나한테도 아버지가 있다는 게 을매나 좋았는지. 정읍에서 처음 교회를 나가기 시작했어. 교회에 나옴서부터 새벽기도란 걸 안 빠지고. 그러더만 큰오빠가 또 그 사람을 선택해서. 그래서 내가 “왜 많은 사람 있는데 나를 처치할 때가 없어서 그런 사람을 해줬냐”고 그러니. 큰오빠가 “니가 다 살았냐 니대보다 후손이 잘될 것이다” 하는거여. 보는 건 있는 가봐. 젊어서는 나도 그랬는데 말년에는 자식들 땜에 배도 안 곯고 살아요. 을매나 감사한가 몰라요. 그것이 하나님 아버지 덕이지요. 은혜지요.
종자갈이
큰오빠가 교회를 짓다본 게 빚이 많이 있어. 그때만 해도 딸 여울라면<시집보내려면> 뭣 좀 줘야 하거든. 해줄 것도 못 되고 하니까 보육원 선생님한테 보냈어. 큰오빠가 보육원을 시작했었어요. ‘정읍 작은과수원’이라고 과수원에다가. 우리 남편이 남원사람이었는데 어떻게 알아가지고 선생으로 들어왔지. 우리 어머니더러 가서 보라고 했대. 다 좋은데 키가 크더라, 니가. 결혼할 때서 봤어.
우리 집 양반이 일정 때 군대 갔다 와서 시험을 봐서 순경에 합격을 했어. 5일인가 했대. 근데 운동장을 도는데 오라 그러더래. 키를 재자면 자기가 좀 작다는 걸 알면 요령을 부려야지. 근데 그대로 혀야. 고지지<고지식> 해요. 가식도 없고. 키 작다고 잘려서 이불 지고 내려오는데 울면서 “나는 종자갈이해야겠다” 했대.
오빠가 오라고 해도 안 와. 오면 나한테 저그 할까봐 안 왔겠지. 나보다 작지. 결혼식 하고 사진을 찍는데 키가 맞아야지. 별것 다 갖다놔도 안돼. 근데 사진은 6·25때 다 없어졌어. 밥도 많이 안 먹어서 맘에 안 들었지. 같이 걸음도 안 걸었어요. 그러다가 어느 때 된 게 하나님께서 세계에서 하나밖에 없는 신랑을 주셨는데, 누가 보든 말든. 그때는 내가 손잡고 걸었지. 우리 애들은 참 커. 며느리도 큰놈만 얻었어. 종자갈이 잘혔지.
“아짐, 살려줄 테니 예수 버려”
오빠가 빨갱이를 싫어하는 임동선 전도사를 모셔다 부흥집회를 했어요. 6·25가 나자 예수 믿는다고 두암마을 신자들을 탄압했어. 빨갱이들이 오빠를 잡기 위해 눈에 불을 켰지. 매일 집을 뒤지고 예배 못 드리게 했어. 끌려가 고문을 당하면서도 교회를 지켰어. 10월 19일 그날은 아직도 기억이 생생해요.
남편은 6·25때 갈 사람이었거든. 친정에 피신 왔다가 끌려갔지. 여기서 흥덕이라면 솔찬해요. 남편을 짐을 지게 해서 그리 잡아다가 때리고 속내복만 입히고 가라고 했어요. 동지섣달에 별을 보고 두암을 찾아왔어요. 근데 외지 사람이고 많이 맞았다고 남편은 봐주대요.
근데 어머니는 달랐어요. 둘째 올케가 아기 낳은 지 일주일 되었응게, 건강에 좋다고 약초 뿌리를 캐서 닭에다 넣어 그놈 올케 준다고 내려가셨어. 그때 둘째 올케네 작은방 사는 사람이 어머니를 데려가면서 “늙은이 이제라도 예수 안 믿는다고 하면 살려줄 텐게. 아짐<아주머니>, 아짐이 만약 여기서 예수 믿는다고 하면 내가 칼질해야 혀. 안 그러면 내가 죽으니까” 그렇게 혀도 “야 나 죽으면 하늘나라 가. 하나님을 배반할 수 없어. 죽일 테면 죽여”라고 했어요. 큰오빠가 조카 둘을 데리고 나갔어요. 여섯 살 먹은 놈은 안 데리고 가고. 어머니가 묶여 끌려가면서 그 아아이한테 “배추밭 속에 들어가거라. 조금 있으면 누가 와서 살려 줄 텐게. 나는 하늘나라 간다” 하고 올라갔어요. 우리 어머니 칼질한 사람은 일정 때 순경했었어. ‘곤’자 항렬이에요. 친척이지. 그 당시에는 나라도 안 죽일 수 없어요. 그 사람 삼형제가 칼질했어요. 그 사람들이 데려다 무릎을 꿇려 놓고. 아마 기도하다가 가신 거 같아요.
숨겨 논 아이는 나중에 오빠네 집에 가 있었어. 임시 데려다 놨어. 근데 그 사람들이 “아가 도망갔다. 걔를 살려놓으면 3, 4대까지 다 죽인다. 아 찾아내라” 했어요. 오빠네 집에 데리러 왔더래요. 6·25 후에 그들이 다 예수 믿고 집사 됐어요. 그들은 다 오빠가 손잡고 “세월 잘못 만나서 그렇지 뭔 죄냐. 우리 예수 믿고 천국 가자” 그래서 집사 다 되고. 간 양반도 있고 현재 살아있는 양반도 있고 그래요. 나가 그런 풍파를 겪고 살았어요. 돌아가신 분이 어머니, 둘째 오빠 내외간, 애들 셋, 큰오빠 둘째 아들이에요. 큰오빠 셋째오빠는 교단 총회장까지 하고 큰조카, 둘째 조카도 목사예요.
새벽 기도 다녀온 후 각혈하는 남편
남편은 보육원에서 선생하다 장로교회 있다가 신학하려고 나와 버렸어. 긍게 보육원에 있다 나와 버리니 늙은 어머니 있지 애들 있지. 어쩔 것이여. 그래 가지고 제가 많은 것을 했어요. 안 해본 장사가 없어요. 목사님 학교 가지 애들 셋 가방 들었지. 그리고 그 밑에 또 있지. 남편이 한번은 새벽기도를 갔다 왔는디 각혈을 해요. 각혈을 하는디 8일간을 한거야. 그렁게 나무에다 꺼죽만 입혀놨어. 사람도 아니고 눈도 못 뜨고 말도 못 허고. 그러고 있는 거야. 그런데 우리가 피가 같어요. 같은 A형. 피 넣어야 살지 안 그러면 못 산다고 해서 피를 넣을라고 했는디, “피는 생명잉게 안 받는다. 나는 죽을병이 아니고 하나님 영광 받을라고 이런다. 나는 절대 죽을 병 아닌디 이 시간 이후부터 난 주사 안 맞고 약도 안 먹는다. 음식만 먹는다. 하나님이 살려주시면 살고 나가서 복음을 전하다 이대로 죽는다. 피는 생명이니까 절대 안 맞는다”고 그랬어요. 나는 애들 있고 늙은 어머니 모셔야 하는디 여기서 피를 빼지 말라고. 일테면 급성폐렴이라 격리해 놓고 일절 면회를 못했어요. 목사님들만 했어요. 목사님들이 오면 은혜를 받고 간대요.
근데 우리 목사님이 캄캄한 밤에 금덩어리 하나를 쥐어주는 기쁨이 오드랴. 기쁨이 솟아오르는데 뭐라고 표현을 못하겠드래요. 아침에 데리꼬 가서 목욕을 시켜보고 또 그 이튿날 보듬고 가서 목욕을 시켜보고. 약도 안 먹고 밥만 먹어도 시간시간 달라져요. 그래갖고 나선 게로 군산 오빠한테 갔어. “나 이대로 주의 일 하고 싶다. 내가 학교는 안 갔어도 교역자 못 모신 데로 나 좀 보내달라”고 했어요. 선유도로 보냈어요.
선유도에 가서 있는디 안되것드래요. 통신이라도 해야겠다고 생각해 공부를 했어요. 나와서 고창 성북교회 보육원에 총무로 있으면서 공부를 하는 것이여. 그렇게 통신해서 신학교 공부하고 목사 안수 받았어요.
그러더니 나는 죽었다 해라. 없는 것으로 쳐라 그것이여. 나가 있응게 누가 과부라고 무시하지 안 한게. 나는 맘적으로 그래서 살아만 있어줘라. 그러면 저렇게 키가 엉성하니 팔자가 세다는 소리는 안 듣잖여.
목사안수를 받아가지고는 다시 두암교회로 왔어. 두암교회에 10년 있다가 아파서 선유도로 갔다 다시 두암교회에서 십몇 년 있었어요. 여기 있다가 고창 성북교회, 정읍성결교회, 그러다가 부안 남포리에 갔어. 그때 순교자 교회를 지으려고 하는 판이여. 교회를 짓고 가려고 했는디 부안 남포리가 장로하고 전도사하고 싸움이 나서 치고 패고 고소하고 댕긴다고 지방에서 우리가 가야 수습이 된다고 해서 간게로 거가서 잘 수습해서 남포교회 짓고 거기서 은퇴했어요. 은퇴해갖고 정읍성결교회 다니면서 협동목사로 15년 있었네요.
큰아들이 배를 탔어요. 없이 사니까 돈을 보내. 처음 보낸 놈은 남포교회에 앰프를 사놓고. 나머지 교회 다 해놓고 대지를 사는 거야. 교인들이 얼마나 비웃었는지 몰라요. 이런 곳에 왜 대지를 사놓냐. 6·25때 돌아가신 양반들, 농촌에는 자손 없이 돌아가시면 그 재산을 마을에 다 줘요. 마을에다 주면 마을에서 추도식을 잘 지켜줘. 그러니까 여기다 대지를 사놓으면 그 사람들 추도식을 해줄 수 있지 않느냐는 마음에서 땅 4000평을 샀네요. 요만한 밭떼기도 사고 논떼기도 사고. 해놨더니만 시방에 이렇게 요지가 되었어요.
자식에겐 면목 없는 부모
약한 교회로만 댕기니까 자식들 못 도와줬어. 난 안 해본 것이 없어요. 할 줄 아는 것은 기름장수. 기름 짠 거를 집집이 댕기면서 팔았당게. 세를 살아도 돼지를 키웠어요. 그래서 우리 애들이 어깨가 기울어졌어. 돼지 먹이 걷으러댕겨서. 빵장수도 해봤어. 팔려야지. 집에 가면 애들이 좋다고 그러지.
노점에서 싸전<쌀집>도 했어요. 그놈을 하면서 돈을 벌었어요. 고추도 했어요. 동짓달에 녹두값이 오른 게 녹두도 팔고. 없는 교회 따라댕기느라고 해준 것도 없는데 참 잘해요. 길거리에 앉아 떡장수를 하더라도 너희 고등학교까지는 다 한다 했는데 저그들끼리 대학까지 다 나왔어요. 5남매가 헤어지지 않고 처녀총각이 저렇게 살고 5남매가 술장사하는 놈 없고, 난 24시간 감사해도 모자라요. 그저 행복하게 잘살아요.
아이들에게는 내 욕심 부리지 말고 매사에 기도보다 앞서지 말고 성령보다 앞서지 말라고 가르쳤어요. 기도해서 물어보고 결정해라. 내가 앞장서버리면 후유증이 많은 것이라고.
당신은 진정한 행복자
남편이 파킨슨 땜에 말씀도 못하고 눈은 살아있는데 음식도 못 드시고 움직이지 못하니까 욕창이 생겼어. 뒤집는데 그렇게 힘이 들어. 허리를 못 썼당게. 시방 1월에 가시고 나서 많이 좋아졌어. 3년 앓았어. 병원에 모신다고 하니 죽어도 안 간대. 하는 데까진 했어요. 남편도 저도 전체를 기증했어요. 어디다 묘지 하는 것도 싫고 납골당하는 것도 싫다고 해서 수목하려고. 오늘 60살 70살 두 눈 넣어준대. 그러니 어디 눈물이 나와. 감사합니다 했지.
남편이 돌아가시고 찬송가 해주고 “목사님 얼마나 좋아. 하늘나라 예수님 품에 안기니 얼마나 좋아. 앞에 가신 어머니들 오빠들 다 보고. 예수님 보고 얼마나 좋것어. 좋죠. 당신은 행복자야. 당신은 예수님 품에 안긴 행복자야”라고 기도했어요. 그렇게 자상했어요. 지금도 옆에 있는 거 같애. 일테면 짝사랑 한 거 같애. 나는 남자같이 더글더글한데. 시방도 옆에서 이불 덮어주는 것 같아.
정읍=정리 최영경 기자·사진 홍해인 기자 ykchoi@kmib.co.kr
■ 연보
1930년 전북 정읍시 소성면 애당리 두암마을에서 4남1녀의 막내로 태어남
1947년 예수 영접 후 정읍시 입암면 교회 출석
1949년 큰오빠 김용은 전도사가 창립한 두암교회 출석
전북 남원에서 사는 서명선(당시 27세)씨와 결혼
1951년 큰아들 출생
1953년 둘째아들 출생
1956년 셋째아들 출생
1958년 딸 출생
1960년 막내아들 출생
1994년 전북 부안 남포리로 이사
1996년 전북 정읍시로 이사
2011년 1월 남편 별세
■ 두암교회는
미국 성결교 조요셉 선교사의 지원을 받아 1949년 1월 윤임례 집사 가정을 중심으로 윤 집사 아들 김용은 전도사가 세웠다. 6·25전쟁 당시 윤 집사 가족 7명과 마을 사람 및 친척 15명, 피난민 1명이 순교했다. 전쟁으로 교회가 불타고 성도 대부분이 사망해 두암교회는 쉽게 복구되지 않았다. 64년 김태곤 전도사가 주일학교를 열면서 교회를 재건했다. 66년에는 교회를 새로 건축했을 뿐 아니라 가매장했던 순교자들의 무덤을 교회 동산으로 이장하고 ‘순교자의 묘’로 합장했다. 94년 김용은 김용칠 목사 형제 은퇴비로 현재의 교회를 건축했다. 2000년 11대 홍용휘 목사가 부임, 현재까지 시무 중이다. 재적·출석 성도 대부분이 70, 80대 할머니로 30여명이며 초·중등부 15명이 출석한다. 전북 정읍시 소성면 애당리 316(063-537-68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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