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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나 쓸쓸했으면… 노인들, 사기꾼 약장수에 속고도 “자식보다 낫다” 선처 호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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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은평경찰서는 최근 건강식품 판매업자들이 행사장을 차린 서울 홍은동의 한 건물을 덮쳤다. 노인을 속여 건강식품을 비싸게 판다는 첩보에 따라 현장을 급습한 것이다.

경찰이 행사장을 촬영하고 회계장부 등을 조사하자 한 할머니는 “우리한테 잘해주는 사람들을 왜 잡아가려 하느냐”며 되레 따져 물었다. 다른 노인도 “이 사람들은 아무 잘못이 없다” “나쁜 사람들이 아니다”며 사기꾼 약장수들을 감싸기에 바빴다.

은평서는 업자 홍모(44)씨 등 6명을 현장에서 검거해 건강기능식품법 위반 혐의로 불구속 입건했다고 19일 밝혔다. 은평서는 다른 2개 조직의 9명을 더 붙잡아 같은 혐의로 불구속 입건했다.

이들은 지난 2월부터 최근까지 서대문·은평구에서 각각 60, 70대 노인 150∼200명에게 1만∼6만원대 제품을 최대 7배 비싸게 팔아 조직당 340만∼2600만원씩 모두 4940만원을 챙긴 혐의다. 업자들은 칼슘과 비타민 등을 팔면서 “연골이 되살아나고 신경통이 낫는다”며 효과를 과장했다.

노인을 꾄 상술은 무심한 아들과 딸이 흉내낼 수 없는 ‘효심 공세’였다. 대부분 여성인 노인들은 집에서 받아보지 못한 정성에 감복했다고 했다.

이들은 먼저 “좋은 행사가 있다”며 노인들을 한 곳으로 부른 뒤 함께 춤추고 노래하며 흥을 돋웠다. 이어 ‘어머니’라고 부르며 팔다리를 주무르고 분위기가 무르익으면 “자식 다 소용없다. 어머니 몸은 직접 챙기셔야 한다”며 제품을 소개했다.

업자들로부터 건강식품 수십만원어치를 산 불광동 박모(72·여)씨는 “아들과 딸도 그렇게 안 해주는데, 우리 같은 늙은이한테 워낙 친절하게 대해주니 용돈을 다 쓴다”며 “어느 집은 거기서 물건을 사고 공짜로 받은 화장지가 방 하나 가득하다”고 전했다.

성모(67·여)씨는 “어느 자식이 날 이렇게 위해주나, 그런 생각이 들 정도”라고 말했다. 친구를 따라갔다는 하모(69·여)씨는 “어머니, 어머니 하고 살갑게 대해주니 마음에 위안이 되고 존재감이 생기더라”며 “그 순간만큼은 돈이 문제가 안 된다”고 했다.

경찰은 업자들을 검거하면 노인들이 “잘못한 게 없는 사람들”이라며 선처를 호소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라고 전했다. “동료가 경찰에 잡혔는데 진정서를 써주면 빨리 나온다”는 업자의 말에 서명한 노인도 있다.

은평서 박찬우 수사과장은 “할머니들이 평소 얼마나 정에 목이 말랐으면 단속할 때마다 같은 상황이 벌어진다”며 “사기꾼을 감싸는 할머니들을 볼 때마다 자식들이 깊이 반성해야 한다는 생각이 든다”고 말했다.

강창욱 백상진 기자 kcw@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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