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말리아 해적 피랍 선원 증언 “마약풀 씹는 해적… 100일 지나면 죽여줬으면 싶어”

“바쁘시더라도 납치된 선원들에게 제발 관심을 끄지 말아 주세요.”

A씨의 눈빛은 간절했다. 그는 이 말을 끝으로 사라졌다. 자기 얘기를 기사로 써 달라는 사람, 한두 번 만나는 건 아니지만 A씨는 좀 달랐다.

그는 수년 전 소말리아 해적에 납치됐던 선원이다(자신이 탔던 선박 이름은 밝히지 말아달라고 했다). 그 해적들은 지금 삼호드림호와 금미305호를 납치해 억류하고 있다.

22일 기준으로 드림호 202일째, 금미호 14일째.

A씨는 수차례 만남을 거부했다. 해적들에게 풀려난 뒤 한동안 정부도, 회사도 구출에 적극적이지 않았다며 쓴 소리를 하고 다녀 수산업계에서 직장 구하기가 어려웠다고 한다. 최근 어렵사리 일자리를 구한 터라 조용히 입 다물고 선원으로 살고 싶었을 것이다.

지난 19일 어렵게 이뤄진 인터뷰에서 그는 “이렇게 조용히 있으면 안 되고, 이번에 납치된 사람들에게 뭔가 도움이 돼야 한다는 걸 알지만, 피랍 이후 세상 모든 게 두려운 겁쟁이가 됐다”며 말문을 열었다.

해적이 인질을 죽이진 않는다고? 누가 보장하나?

“해적들의 살해 위협도 점점 거세지고 있다. 밥도 주지 않고 잠도 안 재운 채 이틀 동안 우리를 폭행했다. 돈이 오지 않으면 차례차례 살해하겠다고 협박해 공포에 떨고 있다.” 삼호드림호 김성규 선장의 절규가 지난달 9일 국내 언론을 통해 전달됐다.

인질의 호소를 통해 몸값을 올리려는 해적들의 전형적인 수법이다, 말려들면 안 된다, 지나친 언론 보도가 협상에 도움 되지 않으니 냉정하자, 국내에선 이런 관측이 난무했다.

보도를 접한 A씨는 침통했다고 한다. 억류돼 있지 않은 이들은 ‘비즈니스’를 논했지만 억류돼 본 선원의 입장은 달랐다. 그는 지금 선원들이 느낄 고통을 같이 느끼는 듯했다.

“해적들도 선장과 기관장이 어떤 지위인지 알기 때문에 어느 정도 예우를 합니다. 그런데 선장에게까지 심한 위협이 가해졌다면, 이제 해적도 선을 넘은 거예요. 처음에는 ‘안심해라’ 선원들에게 말하던 해적도 배에 장기간 갇혀 있으면서 슬슬 미쳐요. 칫솔, 입던 팬티까지 하나씩 가져가다 억류 20일쯤 넘어 뺏을 게 없어지고, 도움이 안 되면 더 괴롭히는 거죠. 납치 100일이 지나면 차라리 해적들이 죽여줬으면 좋겠다, 목숨을 끊고 싶다, 내가 죽더라도 해적들을 죽이겠다, 왜 국가는 날 구하러 오지 않나 그런 생각이… 지금 납치된 선원들도 그럴 겁니다.”

삼호드림호는 이제껏 소말리아 해적에 납치됐던 한국인 승선 선박 7척 가운데 가장 오래 억류돼 있다. 200일 넘게 협상하며 2000만 달러까지 치솟았다는 몸값과 그 전달 방법 등을 놓고 밀고 당기기가 이어지고 있다. 그 바탕에는 해적들이 인질인 선원들을 죽이지 않을 거라는 믿음이 깔려 있다.

“소말리아 해적이 사람을 안 죽인다고요? 이제껏 죽은 사람, 없다고는 들었습니다. 하지만 그걸 누가 장담하죠? 해적들은 항상 마약풀을 씹고 있어요. 어느 순간 눈에 초점이 없어지면 선원들은 두려움이 엄습합니다. 해적 대장보다 졸병들이 더 위험한 존재예요. 윗사람들이 노략질한 것 다 가져가니까 힘없는 졸병들이 밤만 되면 선원들 자는 데 와서 괴롭혀요. 총을 이마에 겨누고, 몽둥이로 때리고. 감금된 선원들 사이에도 몸싸움이 붙고, 윗사람 아랫사람 개념도 없어지는, 억류 기간이 오래 되면 배 안은 누구도 통솔할 수 없는 곳이 됩니다.”

A씨는 무엇보다 선원들이 제대로 먹고 있는지 걱정된다고 했다. 어선은 8개월 치 이상 식량을 싣고 항해하지만 상선인 삼호드림호는 식자재 분량이 20일치 안팎일 거라고 한다.

그에게 어떻게 해적에게서 풀려날 수 있었냐고 물었다. “언론이 우리에게 관심을 가져줘서요.” A씨의 대답은 단호했다. 정부와 선주가 서로 책임을 미루는 사이 A씨가 납치된 배는 다행히 사람들의 관심에서 멀어지지 않았다고 했다. 왜 바다에 버려진 사람들을 구하지 않느냐는 국민들의 시선이, 선주와 정부가 조속히 협상에 나서도록 이끌었다는 것이다.

삼호드림호, 금미305호 가족들은 왜 나서지 않는 것일까? “제가 납치됐을 때도 그랬어요. 정부가 가족들에게 언론에 나서지 말라고 부탁하니까요.” 그는 이렇게 믿고 있었다.

삼호드림호, 금미호 알려지지 않은 협상

“알아서 하겠습니다. 나중에 도움을 요청하든지… 지금은 전화를 받을 수가 없습니다.”(금미305호 선주 김모씨의 아내)

“지금 감정이… 토할 것 같아요. 가 주세요.”(김씨의 딸)

만나려 했던 삼호드림호, 금미305호 선원 가족들은 모두 침묵으로 일관했다. 삼호드림호 선원들이 소속된 전국선박관리선원노조 박성용 위원장도 외교통상부의 행보를 답답해했다.

“정부에 대한 신뢰가 무너지고 있습니다. 마음 같아선 제대로 협상하고 있는지 묻고, 따지고, 언론에도 대문짝만하게 내고 싶어요. 하지만 중요한 게 선원들 목숨이니까, 기다리는 게 낫지 않나, 잘못 행동해서 협상 망치는 건 아닐까 그런 마음에 참는 겁니다.”

7개월 가까인 진행돼 온 삼호드림호 협상 과정은 구체적으로 알려진 게 많지 않다. 해적 내부 갈등으로 억류가 장기화되고 있다는 분석이 나오고 있는 정도다.

“삼호드림호 배 값만 수백억원입니다. 해적한테 붙잡혔을 때 원유도 가득 실었어요. 시간이 곧 돈인 배인데, 삼호그룹 측은 당연히 하루라도 빨리 배를 찾는 게 이득이죠. 수백억원짜리 배를 수십 척 보유한 회사가 삼호해운인데, 협상 금액은 마련돼 있다고 들었습니다.”(박성용 위원장)

용선료(傭船料)만 하루 5만 달러로 알려진 삼호드림호는 31만9360t짜리 대형 유조선이다. 한국인 선원 5명, 필리핀인 19명이 승선했다. 과거 어선이 납치됐을 때는 인질 몸값이 대략 1인당 10만 달러 선에서 형성됐다. 삼호드림호는 기름을 잔뜩 실은 유조선이어서 해적들이 몸값으로 모두 2000만 달러를 불렀다고 한다.

현재 회사 측 브로커와 해적 측 브로커 간 협상이 진행 중이다. 해적들은 수시로 삼호해운에 연락을 해오고, 이 소식이 가족들에게도 전달되고 있다. 2006년 동원호 납치 때도 일당 3500달러에 고용한 영국인 브로커가 협상을 담당했다. 이번에도 영국인 협상 전문가가 고용된 것으로 알려졌다.

“식량팀, 마약팀, 무기팀 등 그룹을 나눠 활동하는 해적들끼리도 협상 금액과 분배 방식을 놓고 합의가 안 됐고, 의심 많은 해적들 사이에서 누가 돈을 전달받을지를 두고도 의견이 갈렸어요. 삼호그룹도 돈 줬는데 배달사고 나면 안 되니까 조심에 조심을 더할 수밖에 없고.”(전국해상산업노동조합연맹 관계자) 몸값이 높은 대형 선박일수록 납치에 가담한 인원이 많아 이해관계가 복잡하다는 것이다.

반면 케냐 선적인 금미305호는 선주까지 잡혀간 첫 사례다. 선주이자 선장인 김모(54)씨가 배와 함께 납치돼 케냐에도, 국내에도 석방 협상에 나설 회사나 개인이 없다. 정부는 테러범이나 해적과 협상하지 않는다는 원칙을 고수한다. 지금까지 해적 피랍 사건은 모두 정부 대신 선주가 전면에 나서서 협상을 진행했다.

2006년 피랍 당시 동원호에 승선해 다큐멘터리를 촬영했던 프리랜서 PD 김영미씨는 이렇게 말했다. “납치된 금미호 선주 김씨가 ‘내가 선주다. 돈 없다’고 말해봤자 해적들이 믿겠어요? 결국 정부가 나서지 않으면 절대 해결이 안 되는 사건이 처음 터진 거예요. 정부 입장에선 선주에게 미룰 수 없는, 폭탄 같은 상황이 벌어진 거죠.”

선주 김씨의 가족도 경제적 여력이 없다고 한다. 김씨의 대학 동창인 김채곤 전국원양산업노조 총무국장은 “김씨는 국내에서 참치를 잡다 운영이 어려워 빚도 제대로 정리하지 못하고 케냐로 떠났다. 케냐에서도 동창들에게 100만원만 빌려 달라는 연락을 할 정도였다”고 전했다.

2007년 마부노호가 납치됐을 때도 선주가 몸값을 다 마련하지 못해 전국해상산업노조가 모금운동을 벌여 7억여원을 건넸다. 마부노호는 탄자니아 선적인 데다 억류 선원 중 노조원도 없었지만 ‘같은 뱃사람’이란 이유로 노조가 지원에 나섰다. 이번에도 전국해상산업노조가 구명운동을 벌일지, 아직은 정해진 게 없다.

해적에게도, 선원에게도 황금어장인 소말리아

“위험한 바다에 고기가 몰린다.” 선원들이 하는 얘기다. 소말리아 해역은 상선의 길목이자, 어선엔 돈 되는 ‘물건’이 모이는 곳이다. 아시아에서 유럽까지 최단 코스로 가려면 이집트 수에즈운하를 거쳐야 하고, 수에즈운하로 가는 길목에 소말리아 해역이 있다. 참치, 상어, 게, 새우 등 고급 어종도 이곳에서 많이 잡힌다.

1991년 내전 이후 사실상 무정부 상태인 소말리아는 해적들의 온상이다. 3000㎞ 긴 해안선을 가진 해상 교통의 요지에서 해적질은 하나의 비즈니스다. 국민의 75%가 하루 2달러 미만으로 살아가는 소말리아 사람들에게 해적들이 푸는 돈은 생계가 걸린 자금줄이다. 인도네시아 말라카해협이나 나이지리아 연안에도 해적이 출몰하지만 선원들을 인질로 잡아가는 것은 소말리아 해적만의 수법이다.

활동 무대도 점차 넓어지고 있다. 2007년엔 소말리아 해안에서 최대 370㎞에 불과하던 해적 활동 영역이 2010년에는 2037㎞로 확대됐다. 미국, 유럽연합, 한국 등의 군함 21척이 보호할 수 있는 범위를 넘어선 것이다. 삼호드림호가 납치된 곳도 소말리아 인근 아덴만 동남쪽 1500㎞ 해역으로 예전엔 위험한 바다가 아니었다.

“한때는 우리나라 원양어업 노동자가 5만명, 1년에 벌어들이는 돈이 5억 달러 이상이었습니다. 선원들이야 말로 외화벌이의 일등공신이었어요. 납치범이 해적이라고 정부가 나서지 않으면 우리 같은 국민은 누가 지켜줍니까?” 전국해상산업노조 전 조직국장인 공원범씨의 하소연이다.

부산=박유리 기자 nopimula@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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