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 칼럼 > 시사풍향계

[시사풍향계―이기웅] 안중근,古典에서 피어난 꽃

[시사풍향계―이기웅] 안중근,古典에서 피어난 꽃 기사의 사진

며칠 전, ‘안중근 유묵(遺墨) 전시’를 준비중인 서예박물관에 들렀습니다. 도록에 실릴 글을 쓰실 학자와 동행하는 기회에, 이 박물관의 수장고에 속속 도착하고 있는 안중근 님의 진적(眞迹) 하나하나를 뵈면서 가슴이 에이는 듯한 감회에 젖었습니다. 그러는 한편 행복했습니다. 왜일까요. 그분의 글씨로 드러난 말씀들이 백 년 세월의 먼 거리를 거침없이 달려와 우리 앞에 서 계셨기 때문입니다. 저는 그분을 향해 마주섰습니다. 제 이성의 눈은 차갑게 열려 있었지만, 제 가슴은 감격과 거대한 깨달음으로 따뜻하다 못해 뜨거웠지요. 참으로 행복했습니다.

서예는 한·중·일 세 나라에서만 행해지는 예술입니다. 예술이라기보다 생활이요 삶이었지요. ‘그리는’ 예술이 아니라 ‘쓰는’ 예술이지요. 쓴다고 하는 것은 그리는 것과는 좀 달라서 문자를 기반으로 생성했으며, 동양정신의 중심으로 성립돼 왔습니다.

화평을 위한 처연한 함성

우리나라에서는 흔히 ‘서예(書藝)’라고 하지만 중국에서는 ‘서법(書法)’, 일본에서는 ‘서도(書道)’라 한답니다. 각기 藝와 法과 道라 일컬으면서도 같은 의미로 공유하며 소통했던 이 세 나라 사람들이 평화와 번영이라는 깃발 아래 힘을 합친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고민하셨던 안중근 님의 동양평화론은 충분히 수긍되는 정직하고 진정한 발상이었습니다.

오늘로부터 꼭 백 년 전인 1909년 10월 26일 하얼빈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응징했고, 체포되는 순간부터 검찰관과 재판장을 비롯한 모든 적대적 요소들과 전쟁을 벌이십니다. 의병장군으로서의 무장투쟁과는 달리 ‘말의 전쟁’을 시작하셨지요. 말과 문자를 수단으로 해서 펼친 다섯 달 동안의 전쟁은 치열하다 못해 처연(凄然)했습니다. 법정에서 펴신 그분의 말씀 한마디 한마디는 ‘화평을 향한 전쟁’의 함성이요 ‘민족교향시’였습니다. 석 달 동안 검찰관과, 그리고 여덟 날 동안의 재판장과 벌인 ‘말의 전쟁’ 틈틈이, 또한 1910년 2월 14일 사형언도가 내려진 이후 서거하기까지 열사흘 동안 그분은 문자향(文字香) 가득한, 그러나 한 장군의 기개를 듬뿍 담은 서(書)의 세계를 통해 자신의 생각을 폄으로써 주위와 소통하려 했습니다.

그분께서 노심초사하셨던 ‘동양평화’를 상징하듯, 이처럼 글씨쓰기를 통해 세 나라 사람들과 소통하시려 했던 것이지요. 그 흔적들이 생생한 모습으로 우리 앞에 와 있는 것입니다.

서예사상가 송하경 님은 그분의 서법을 ‘곧음의 사상’(直思想)으로 표현합니다. 예술로 바라보더라도, 글씨의 잘 쓰고 못 씀의 문제를 떠나 “한 점 한 획에 흐트러짐이 없다. 한마디로, 곧음(直)의 미학이다”라고 정의내리고 있습니다. 그 곧음은 송시열 비견되는 강직함이 묻어난다고 합니다. 제가 엮은 책의 서문에서 밝힌 바대로, 그분의 생각은 “홀로 있는 곳에서 삼간다(愼獨)”는 기초 위에 서 있습니다. 자기를 속이지 않는 인격, 이 얼마나 놀랍고도 지난한 세계일까요.

법정기록은 시대정신 담아

한편 당시 뤼순법원에서의 법정진술 한마디 한마디는 ‘시대정신의 표출’입니다. 저는 꼭 십 년 전 이 법정 기록을 엮어 “안중근 전쟁, 끝나지 않았다”라는 책을 펴낸 바 있습니다만, 바로 오늘 그 책의 개정판을 출간해 여러분 앞에 보여드립니다. 한치의 가감이나 꾸밈이 없는 이 기록은 일본의 법원이 검찰관 신문조서와 공판시말서라는 기록으로 보유하고 있는 자료를 그대로 옮겨 엮은 것입니다. 안중근이라는 거대한 산맥을 오르려면 이 오름지도(登攀地圖)와도 같은 원자료를 파악하는 일이라고 생각해서 책을 냈습니다. 저는 이 책을 국민교과서라고 부릅니다. 이 책과 더불어 유묵을 그분의 생각과 정신을 배우는 ‘두 개의 축’으로 표현하고 싶습니다.

안중근은 고전의 토양에서 자라고 핀 한 떨기 꽃이었습니다. 그분의 삶은 한 편의 민족교향곡이었습니다. 아직 다 밝혀져 있지 못한 미완성의 이 교향곡을 완성시켜야 할 우리의 책무를 생각해 보는 순간입니다.



이기웅(열화당 발행인)



GoodNews paper ⓒ 국민일보(www.kmib.co.kr), 무단전재, 수집, 재배포 및 AI학습 이용 금지

국민일보 신문구독
X 페이스북 카카오톡